13.

실성

by 서량 김종빈

요즘 나는 여행 속 풍경들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탓에 꽤나 고심 중이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켜놓고,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기계가 커피를 쥐어짜는 동안, 정수기에서 얼음을 텀블러 가득 받는다. 그리고 너덜너덜하게 쥐어짜진 커피를 텀블러에 부어서 흔들면 적당히 시원한 음료, 정확히는 연료가 된다. 그걸 들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로그인하려고 하면 화면 가득 여행 속 풍경이 펼쳐져있다.

그러면 나는 '여기 또 어디지?' 하고 잠시 갸웃거리다가 이내 텀블러를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로그인을 해버린다. 몰랐는데 바탕화면에 그런 게 있나 보다. 여행 사진 같은 게 자동으로 소개되는 기능 말이다.

근데 내 눈 앞에 펼쳐져서 나를 고심하게 만드는 풍경은 이게 아니다. 사실, 이게 정신병이 아닌가 싶어 이야기하기까지도 좀 주저했었다. 일종의 환각, 환상을 보는 상태라서 말이다.

보통은 일이란 걸 마구잡이로 하다 보면 대중없이 벌어진다. 어떤 날은 엑셀을 돌리다가, 어떤 날은 공문을 기안하다가, 어떤 날은 그냥 노트북 바탕화면 속 정리안 된 폴더들을 보다가, 눈 앞에 여행 중에 보았던 풍경들이 겹쳐 보이는 거다.

세렝게티 초원도 있고, 남극해도 있다. 어떤 날은 하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시장 풍경, 또 어떤 날은 악어니 피라냐니 하던 긴 강줄기, 어떤 날은 탱고가 가득한 광장도 있다. 형형색색이 가득하던 아프리카 어느 시골의 축제도 있고, 오래된 항구에 앉아 꽃을 건네던 연인도 있다. 말하자면 끝이 없다.

사무실에 한평이나 될까 싶은 자리에서, 모니터를 보고 일하는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누가 믿어나 줄까. 근데 정말 이러니,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거다.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옆자리에 앉은 동료직원에게 슬쩍 말했더니, 대뜸 돌아오는 답이 향수란다.

'에? 향수? 그럴 리가 없다. 먼저는 그다지 그립지도 않거니와, 그 순간들이 좋기는 했지만 전부 다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생생히 기억하는데 향수라니 말도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8년간 군에서 고생한 게 더 절절해야지. 바다며 군함 같은 건 생각도 잘 안 나는데 향수는 아니다.'

혼자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그 와중에 동료직원은 한마디 더 한다. "K님, 때때로 외국 이야기할 때 얼마나 생기가 넘치고 눈이 반짝거리는 줄 아세요?" 그리고는 막 웃는데, 괜히 민망하기까지 하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간 생각했었다. 내가 정말 왜 이런 환각을 보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그러던 중 오늘도 평소처럼 하얀 화면에 키보드를 쳐가며 활자들을 구겨 넣고 있는데, 파타고니아가 겹쳐 보이자 나는 고민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이 정신병을 좀 즐겨보기로 했다. '초코바'. 파타고니아가 겹쳐 보이자 속에서 순간 떠오른 단어였다. 파타고니아에서 3일짜리 산길을 하루 만에 타겠다고 힙색에 초코바와 물병만 넣고 달리듯 산을 올랐는데, 그게 생각났다.

풍경이 불쑥 말을 걸어오면, 나는 순순히 답하는 수밖에. 이쯤 되면 철저하게 정신병을 즐기기로 한 것 같다.

추억에 엉키어 발이 묶이는 건 원치 않지만, 종종 쉬어가는 자리라면 그래도 되지 않나 싶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라지만, 못 돌아갈 곳은 또 아니라서 말이다.

현실뿐인 현실에서 환상이 찾아와 주면 설령 정신병 같다고 한들 고맙지 않은가. 더욱이나 앞으로 한참이나 더 현실뿐인 현실들을 살아내야 한다면 고맙고 말고.

글 한 줌 없던 날이 계속 지나다가도 오늘처럼 뒤숭숭하고 설익은 몇 자라도 나오면 기쁜 일이다.

내 집 하나 없어서 이도 저도 포기하며 살다가도 당신 생각에 마음 저릿해 잠을 뒤척이게 되면 그것도 기쁜 일이다.

허연 모니터 화면에 환각일지언정 지난 풍경이 선명히 떠오른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기뻐하기로 했다. 비바람에 풀꽃이 흔들리면 그것만으로도 기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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