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마지막 수선

by 지구 외계인

저녁 바람이 느리게 들어왔다. 촛농이 단단해진 그물은 낮보다 덜 흔들렸고, 바닥의 원은 손가락 자국들을 얕게 품은 채 온기를 지켰다. 병과 돌판은 서로의 그림자를 주고받았다. 벽의 선언문은 낮의 숨을 밤으로 넘기는 중이었다. 주인장이 수선대 앞에 서서 모래시계를 한 번 눕혔다. 시간은 흘러가다 멈추는 척, 멈추다 가만히 고였다.

그가 나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반지 이모, 운동복 학생, 빵집 주인, 버스 운전사, 정장 남자, 청소 아주머니, 유모차 엄마, 기타 학생, 그리고 문턱 바깥에 조용히 서 있는 검은 우산의 그. 모두 숨을 가볍게 맞췄다. 주인장이 입술을 떼었다.

“이제 내 차례네요. 나도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방 안의 온도가 한 칸 내려앉았다가 도로 올랐다. 그는 서랍에서 회색 재킷을 꺼냈다. 어깨선에 오래된 매듭. 실마리가 아주 조금, 마른 가지처럼 굳어 있었다. 보자마자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늘 남의 천에 얹던 한 땀을, 자기에게는 끝내 못 얹어 둔 자리. 그는 재킷을 수선대 위에 펼쳐 놓고 돌판을 옆으로 당겼다. 돌판의 글자가 밤빛을 받아 또렷해졌다.

먼저 부름

그가 낮게 웃었다.

“이 글자를 가장 가까이 두고 일했지만, 저는 자주 잊었습니다. 오늘은 잊지 않겠습니다. 먼저 듣고, 천천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작은 종을 들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귀에만 들리게.”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아주 작게 울렸다. 내 귀에만 들렸고, 그의 귀에도 들렸다. 방의 떨림이 얇아졌다. 그는 이유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죄책감을 ‘내일’로만 보내는 버릇을 고치고 싶습니다.”

“…”

“나는 나를 벌주느라 남의 이유만 고치는 버릇을 멈추고 싶습니다.”

“…”

“나는 혼자 오래 갖는 행운을 놓고, 함께 짧아도 따뜻한 행운을 택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 뒤에 점 하나가 자연히 붙었다. 우리는 그 점을 숨으로 들었다. 주인장이 재킷의 어깨 매듭을 손끝으로 만졌다. 마른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의식을 시작하죠.”

그가 순서를 말했다.

“첫째, 말로 데웁니다. 각자 한 줄. ‘나를 지키는 말’이 아니라 ‘당신을 덜 외롭게 하는 말’로.”

이모가 먼저 나섰다. 손등의 원을 한 번 쓰다듬고 재킷에 시선을 얹었다.

“당신이 놓친 자리, 우리가 같이 찾겠습니다.”

학생이 곧바로 붙였다.

“당신 어깨선이 무너질 때, 내 마지막 한 걸음을 내어 드립니다.”

빵집 주인이 모서리 조각을 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처음 두 덩이는 오늘도 나눕니다. 가운데는 나중에. 그러니 어깨는 굶지 않습니다.”

운전사가 모자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문턱에서 2초를 더 엽니다. 당신이 지나가기 좋은 각도로.”

정장 남자도 한 줄.

“질문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먼저 ‘괜찮다’고 말하겠습니다.”

청소 아주머니가 미소를 얹었다.

“반짝임이 차갑지 않게, 발로 데우겠습니다.”

문장은 길지 않았고, 모두 현재형이었다. 말들이 재킷 위에 얇게 내려앉았다. 온도가 한 겹, 두 겹 덧입혀졌다.

“둘째, 손으로 지나갑니다.” 주인장이 바늘을 꺼냈다. “꿰매지 않습니다. 찌르지 않습니다. 지나가기만.”

그는 바늘귀에 실을 끼우지 않았다. 빈 바늘. 우리는 차례로 바늘을 잡고 어깨선 위를 천천히 훑었다. 손끝의 체온이 철심을 타고 천으로 옮겨갔다. 이모의 손이 지나가자 매듭 주변의 주름이 약간 풀렸다. 학생의 손이 지나가자 어깨가 조금 넓어졌다. 빵집 주인의 손이 지나가자 천이 빵결처럼 부드럽게 숨을 쉬었다. 운전사의 손은 각도를 만들었고, 정장 남자의 손은 주름을 다독였다. 아주머니의 손은 반짝임을 눌러 온기를 붙였다.

검은 우산의 그가 문턱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저도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주인장이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들고 오셨다면.”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말이 있었다.

“밖으로 팔지 않고, 안에서 되돌리기로.”

그는 문턱을 넘지 않았다. 대신 문 너머에서 손을 내밀어 바늘을 잠깐 받았다. 손끝이 긴장으로 마른 듯했지만, 지나가는 순간만은 부드러웠다. 바늘이 어깨의 매듭 위를 스칠 때,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났다. 매듭 속에 박혀 있던 먼지의 숨 같은 소리.

“셋째, 장치를 ‘한 사람’으로 맞춥니다.” 주인장이 그물 아래에 작은 빛을 모았다. “오늘의 중심은 주인장의 어깨.”

우리는 그물의 매듭마다 촛농 한 방울씩 더하며, 말 대신 종소리를 쌓았다. 앞에서 낮게, 귀에만. 종은 들릴 듯 말 듯했고, 들리지 않는 소리는 온도가 되었다. 바닥의 원에는 모래시계를 눕혀 두었다.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오늘이라는 그릇만 깊어졌다.

“넷째, 벽에서 한 줄을 내려 어깨에 얹습니다.” 내가 선언문을 훑어 한 줄을 골랐다. 손끝이 멈춘 곳. 우리가 낮부터 여러 번 읽었던 문장.

— 먼저 부르지 않는다. 대신, 먼저 듣는다.

나는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떼어 재킷 어깨 위에 올렸다. 종이의 모서리가 실밥에 살짝 걸렸다. 종이 아래에서 매듭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주인장이 숨을 들이쉬었다.

“다섯째, 주인이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어둡지 않았다. 다만 깊었다.

“나는 오늘, 내 상처를 오늘로 옮깁니다. 내일로 밀지 않습니다.”

“…”

“나는 오늘, 먼저 듣겠습니다.”

“…”

“나는 오늘, 내 몫의 따뜻함을 오래 갖지 않겠습니다.”

그가 마지막 문장을 말하자, 바늘을 잡고 있던 내 손끝에서 아주 가는 떨림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어깨의 오래된 매듭이 ‘툭’ 하고 소리를 내며 느슨해졌다. 소리는 작았지만, 방 안의 모든 귀가 동시에 들었다. 벽의 그 한 줄—‘먼저 부르지 않는다. 대신, 먼저 듣는다’—의 아래 모서리가 바람 없이 살짝 들렸다가, 도로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종이를 뜯어 어깨에 얹어 둔 내가, 다시 벽으로 옮겨 붙이려는 찰나, 종이가 먼저 벽을 알아보고 붙었다. 풀칠하지 않았는데도.

“풀렸네요.” 이모가 숨을 내쉬었다.

“네.” 주인장이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아픔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고집이 풀렸습니다.”

우리는 한 박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의식의 마지막 절이었다. 모래시계는 여전히 누워 있었고, 시간은 아직 서 있었다. 주인장이 모래시계를 일으켜 세웠다. 모래가 천천히 흘렀다.

“마지막 절차입니다.” 그가 미소를 얹었다. “한 땀. 모두의 손으로.”

“꿰매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학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꿰매지 않습니다. 그러나 ‘붙들’ 한 땀은 필요합니다. 이건 봉합이 아니라 표식. 오늘 지나간 손들의 합의.”

그는 아주 짧고 부드러운 실 한 올을 꺼냈다. 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차례로 실의 끝을 집어 올려 어깨선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바뀔 때마다 실이 조금씩 방향을 비틀더니, 마지막에 작은 고리를 만들었다. 매듭도, 매듭을 잠그는 마디도 없는 고리. 놓치면 풀리고, 함께 보면 보이는 고리.

주인장이 그 고리를 보다가, 낮게 말했다.

“이건… 나 혼자면 보이지 않겠네요.”

“그래서 함께 보려고 만드는 겁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는 재킷을 조심스럽게 걸쳤다. 어깨가 어울렸다. 더 넓어지지도, 더 좁아지지도 않았다. 딱 오늘의 어깨였다. 그는 벽을 바라보았다. 선언문의 가운데, 낮에 우리가 적어 붙인 문장들이 서로 기대고 있었다. 그가 한 줄을 손끝으로 가볍게 짚었다.

— 오늘의 우연을 포기하고, 모두의 내일을 얻겠습니다.

그가 아주 작게 웃었다.

“오늘은 우연을 포기하겠습니다.”

우리는 종을 울렸다. 내 귀에만, 그의 귀에만, 그리고 이 방에 이유를 맡기고 간 모든 사람의 귀에만 들리게. 종소리가 사라지자, 그물의 촛농이 완전히 식었다. 흔들림이 멈췄다. 바닥의 원 위에서 모래시계가 제 박자를 찾았다. 병은 얇은 김을 한 번 더 내보내고 조용해졌다. 돌판의 글자는 변함이 없었다.

먼저 부름

그러나 우리는 알았다. 그 글자를 오늘은 다른 식으로 읽게 될 것을. ‘먼저’는 ‘나’가 아니라 ‘이유’라는 것을. ‘부름’은 ‘소유’가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을.

문턱에서 검은 우산의 그가 두 번, 아주 가볍게 유리를 두드리고 멈췄다. 그는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축하드립니다.”

주인장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벽의 자기 한 줄 앞에서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쉬었다. 이모는 손등의 원을 한 번 더 그렸고, 학생은 손목끈을 조용히 만졌다. 빵집 주인은 모서리 빵 하나를 재킷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운전사는 문턱 테이프의 끝을 살짝 눌렀다. 정장 남자는 “내일 면접에서 먼저 방향을 말하겠습니다” 하고 웃었다. 아주머니는 바닥의 물기를 마지막으로 짰다.

문을 닫기 전, 주인장은 접수병에 새 라벨을 넣었다.

오늘의 이유 — 내 어깨를 ‘우리’로 고친다.

불을 낮게 줄이고, 간판은 켜지지 않은 채, 우리는 잠깐 함께 앉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흘러가다 멈추는 척, 멈추다 다시 제 길로 갔다.

그가 재킷의 어깨를 한 번 가볍게 두드렸다.

“무겁지 않네요.”

“오늘의 무게라서요.” 내가 말했다. “내일이 되면 다시 달라질 겁니다.”

“그럼 내일 또 연습하죠.” 그가 미소를 얹었다. “먼저 듣는 법을.”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 아주 작게 울렸다. 내 귀에만, 그의 귀에만. 그리고 벽의 한 줄이, 제자리에서 더 깊이 붙었다. 오래된 매듭은 풀렸고, 그 자리에 이름 없는 고리가 빛도 없이 앉아 있었다. 잡으면 사라지고, 함께 보면 보이는 고리. 마지막 수선은 그래서 ‘마지막’이 아니었다. 오늘의 마지막일 뿐이었다. 내일의 첫 땀이 그 뒤를 잇도록.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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