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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주 Jan 04. 2024

우째도 살아갑니다

우째도 살아갑니다-1 : 24년 새해를 맞아



1월 1일, 이른 오후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휴대폰에는 '올 한해 고생 많았다', '24년도 잘부탁한다', '행복하자'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원래라면 나도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 중 하나로 '23년 덕분에 잘보낼 수 있었습니다. 000님의 24년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를 복사하여 이름만 바꿔 보낸다고 바빴을 것이다. 그중 답장이 오는 것을 적절히 무시해가며 말이다.


그러나 올해는 도통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모든 신년인사를 무시하고 이불 속을 꾸물거리다, 누워있는 것도 지겨워질때쯤 거실로 나가 환기를 시키고 청소기를 돌렸다. 지난 밤 먹은 술병을 치우고 분리수거했다. 설거지 후 세탁기를 마저 돌리고 쇼파에 앉았다. 근 며칠 내린 눈이 녹지 않아서인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푸르다. 그 사이로 고양이 두마리가 미적거리는 광경을 멍하니 입 벌리고 바라보는 것. 나의 성긴 새해였다.


이제 크리스마스의 낭만이나, 연말과 연초를 가르는 하루, 31일에 지고 1일에 뜨는 해에 크게 들뜨지 않는다. 그저 꽝꽝 얼어붙은 도로에 내일 출근하는 건 문제 없을지, 밀린 업무는 어떻게 해나갈지, 1일에 한 업무 실수를 누구 하나 눈치 채지는 않았을지, 그렇다면 난 어떻게 변명할지 고민할 뿐이다.


24년의 나를 정의하자면 햇수로 8년차 직장인, 비정규직 공무원, 올해 4월 그 직장마저 없어질 위험, 벌어놓은 돈은 없고 빚은 많은 삼십대, 20대초만 해도 작가가 되겠다 떵떵거렸으나 쓴 글이라곤 그당시 적어놓은 습작만 존재하는 말뿐인 작가 지망생, 대학 졸업 후 상경하여 어느곳 하나 뿌리내리지 못한 상실감에 울던 외로운 밤을 지나, 이제 적당한 열정과 적당한 혐오, 적당한 긍지와 적당한 염세로 내일을 맞이하는 실향민.


신년 음식으로 잔치국수를 택했다. 얇고 길게 살자는 뜻이다. 멸치와 디포리로 육수를 내고, 고양이털을 주웠다. 금새 뭉근한 육수 냄새가 퍼졌다. 얇게 지단을 만들고, 김치와 단무지를 썰었다. 동거인 '개미'의 어머니가 자주 해줬다는 방식이다. 둘다 누가 뺏어먹기라도 할 것처럼 게눈 감추듯 먹었다.


23년 12월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개미는 그릇을 치우기도 전에 노트북을 열었다. 연휴동안 밀린 업무를 해야한단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은 30대 중반 비정규직 공무원이다. 우리가 지내는 고양시 외각 방 3개짜리 빌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금새 일에 몰두하는 동거인 앞에 앉으니, 뒤늦게나마 지난 한 해를 돌아볼 수 있었다.


지난 1년(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 훼손되고 있었다. 부조리를 느꼈지만 치열히 맞설 생각도, 박차고 나가 다른 직업을 구할 용기도 없었던 비둘기 두 마리였다. 가끔은 이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가끔을 뜨겁게 분노하고, 가끔은 처절히 울며 토로해도 우리의 마지막은 늘 같았다. "그래도 이게 현실이니까", "맞아, 돈은 벌어야지"


그렇게 퇴근길 자유로를 타던 개미는 돌연 기절하였고, 나는 업무 도중 숨을 쉬지 못했다. 개미는 차가 폐차될 정도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나는 태어나 처음 정신과에 갔다.


수선히 상황을 정리한 후 우리는 조금 달라졌다. 개미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일을 그만뒀고, 나는 회사에 퇴사 의향을 밝혔다. 그 과정에서 의논이나 공감은 없었다. 권유나 강제도 아니었다. 각자 원래 이렇게 해야 하는 일인양, 아침에 일어나 양치하고 저녁에 커튼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는 우리 위치를 떠났다.


자유로 위 반파된 차에서 내렸을 때, 코피를 흘리며 자신이 들이받은 앞 차에 고개숙여 사과할 때, 병실 천장을 보며 사고의 경위를 떠올릴 때, 그것이 기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과정에서 언젠지 모를 순간 개미는 변했다. 일과 중 테라스로 뛰어가 마른 공기를 입으로 우겨넣으며 숨쉬려 안달한 내가 어느 순간 변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처음 현실적인 선택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선택을 했다. 스스로를 훼손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각자 퇴사 의향을 밝힌 날, "야, 너도?"하며 서로의 선택에 경악했다. 각자의 선택을 축하했다. 당장의 대출금 이자와 월세, 공과금, 휴대폰 요금은 누가 한지도 모를 한마디 말로 무마됐다.  


"야, 우째도 살아가게 돼있어"


그렇게 말한지 이제 꼭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같은 직종의 다른 직장에 자리 잡았다. 둘 다 승진했고 좋은 인연을 만들어갔다. 물론 지금도 짜증이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눈물이 왈칵 터질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라도 나를 훼손하도록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이다. 어차피 우째도 살아가게 돼있다. 울며 버티지 않아도, 그 길을 도망가도, 회피해도 내 삶이 존재하는 한 어떻게든 살아가게 돼있다. 별 것 아닌 이 결심을 하기까지 꼬박 30년이 넘게 걸렸다.


악착같이 버텼던 시간, 그것이 인내라며 나 자신을 달랜 날이 있었다. 잘 참는게 나의 장점이나 강점이라 여긴 날이 있었다. '못 버티고' 퇴사하는 동료를 보며 마음 한켠으로 하찮은 우월감에 심취한 날이 있다. 이제 '못 버티고' 퇴사한 1인이 되어, '버텼던' 지난 날을 되돌아 보고 있다.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서 말이다.


신년을 맞이하여 이런 글 한 줄을 남기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나에게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망하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걸 말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 큰 실수를 했을 때, 혼쭐이 나서 기가 죽을 때, 그 외에 친구와 연인이 주는 크고 작은 아픔에도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 우째도 살아가니까"


맞이하는 2024년, 여지없이 편안한 일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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