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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Dec 28. 2020

봄비 내리는 날, 다방에서 블랙커피

강진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의 중심에서 만나는 봄비는 세상의 모든 초록을 품은 듯 빗방울마저 싱그러움으로 가득했다. 기분 좋게 내리던 봄비 때문이었을까? 돌담으로 유명한 병영마을의 어느 식당에 도착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푸짐한 남도밥상을 배부르게 먹은 뒤 커피를 마시겠다며 '다방'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언니, 우리 다방에 갈까요?" 

함께 여행을 떠난 언니에게 다방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카페, 커피숍이 아닌 시골 작은 마을에 있는 그 다방. 영화 <라디오스타>에 나오는 청록다방 같은 그런 다방에 가자는 말이었다. 혼자였다면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겠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제안에 맞장구쳐 줄 여행친구가 있었기에 다방을 경험해보기로 했다. 


낮은 건물들이 도로를 사이에 두로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병영 읍내에서 다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식당 가까운 곳에 '금다방'이라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이름의 다방이 있었기에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황색과 붉은색을 섞어 놓은 듯 화려한 색의 레자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금다방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커피를 드시고 계셨고 우리는 한쪽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트렌디한 인테리어와 포토존을 겸비한 요즘의 카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지만 다방 내부는 깔끔한 편이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가구,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만 보이는 작고 뚱뚱한 텔레비전, 색이 바랜 벽걸이 선풍기, 아치형 주방 입구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릴 적 몇 번 가본 적이 있던 그런 다방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진관을 하시는 외삼촌 댁에 가면 삼촌은 늘 다방에 전화를 걸어 율무차를 시켜주셨다. 어른들은 커피를 드시고 어렸던 나는 율무차를 마셨는데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바이를 탄 언니가 보자기로 싼 쟁반과 컵, 물병을 들고 와 빠른 손놀림으로 커피와 율무차를 타 줬다. 달콤하고 고소한 율무차 위에는 땅콩이 둥둥 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율무차가 금방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아쉬워 한 모금 한 모금 소중히 아껴가며 마셨던 기억이 있다. 성인이 된 뒤에 외삼촌의 사진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삼촌은 다방에 전화를 하셨고, 율무차가 아닌 커피를 주문하셨다. 율무차가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여자 둘이 다방에 왔다는 사실이 하나도 신기하지 않으셨는지 츄리닝을 입으신 사장님은 담담하게 주문을 받으셨고 나는 "커피 주세요"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을 주문을 받고 돌아가며 블랙커피?라고 되물으셨고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사장님이 커피 두 잔을 쟁반에 받쳐 가져오셨다. 다방에서 볼 수 있는 작고 하얀 커피잔에 블랙커피가 들어있었다


아메리카노가 아니고 블랙커피라고 부르니 어색하네~ 하며 한 모금 마셨는데 순간 웃음이 났다. '그래, 이게 다방의 블랙커피인 거지~ ' 커피 향을 풍기는 까만 물은 설탕이 들어가 달콤했다. 설탕의 존재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설탕이 들어간 블랙커피가 당황스러우면서도 이런 상황이 마냥 재미있었다. 커피는 마치 자판기에서 뽑아마시던 설탕 커피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따뜻한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옆 테이블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커피를 드시고는 금방 자리를 떠나셨고 다방에는 우리 두 사람만이 마주 보고 앉아 정적이 흘렀다. 이 어색한 공기를 마주하는 게 결코 편하지 않아 단숨에 커피를 마시고 계산을 한 뒤 금다방을 나섰다.


밖에는 여전히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한 다방의 블랙커피의 달콤한 여운이 병영마을의 돌담길을 걷는 내내 따라다녔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는 오후, 어쩐지 문득 그날의 금다방 블랙커피가 떠올라 핸드드립 커피에 설탕 두 스푼을 넣어 마셨다. 역시, 커피는 그냥 블랙이 맛있다. 


병영읍내의 금다방, 지금은 인테리어가게로 변함
주황색과 붉은 색 사이의 화려한 의자와 소파
빛 바랜 선풍기와 높은 곳에 달려있는 텔레비전
설탕이 들어간 금다방 표 블랙커피
금다방이 있는 병영마을 돌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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