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감정은 나를 아프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경멸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사랑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감정은 오롯이 순수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종종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이중적이라고 느낄 때 스스로를 꾸짖곤 했다. 남편에 대한 마음만 생각해봐도 그러하다.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하지만 가끔 나는 그를 업신여길 때가 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 구스타브와 벨보이 제로의 서로에 대한 감정도 그렇다. 구스타브는 제로의 충성심과 성실함을 더없이 존중하지만, 외양과 출신에 대해서 분명 깔보고 있다. 한편 제로는 구스타브의 철두철미함과 헌신적임을 존경하지만 또 그런 직업의식을 구시대적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구스타브의 여성관으로 알 수 있는 그의 천박한 인성을 경멸한다. 이들의 마음이 무결하지는 못하지만 거기에 분명 '존경'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유의미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애틋함을 느끼게 만든다.
굳이 이런 마음에 이름을 붙이자면 '애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애'와 '증'의 무게가 각각 다를 뿐이지 나는 대체로 모든 사람에 대한 감정이 그런 식이다. 물론 그 '모든 사람' 안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완벽주의가 있는 사람들 말이다. 스스로의 부족함도 그렇고 타인의 단점은 더더욱 눈엣가시처럼 성가시다.
한 사람을 그의 단점과 함께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예전에 동호회에서 알게 된 어떤 남자가 친구의 조건에 대해서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이간질을 일삼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어떻게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마 신도 당신에게 거짓말 좀 그만 하라고 할 겁니다.'
신도 우리에게 바르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그 사랑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역일 것이다. 내가 어리석고 졸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스스로의 감정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꾸짖는 것은 신도 못하는 영역에 대한 도전이 된다.
사실 이 글은 작년에 써놓은 것이다. 항불안제를 먹지 않으면 가슴이 두근거려 생활이 쉽지 않았던 때였다. 나는 그럴 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그 고통을 끊임없이 정의함으로써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이 글도 그 일환이다.
꽤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약을 먹지 않아도 일상을 편안하게 보내고 있다. 결혼을 해서 그런 건지, 수입 없이 살다가 일복이 터져서 그런 건지, 서먹하던 친정 식구들과의 사이가 돈독해져서 그런 건지. 어쩌면 내 마음이 안정을 찾아서 앞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인과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사리가 분명하지 않아도 괴롭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 '미움' 이런 단편적인 단어로 규정하려 하지 말고,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떠올려보면 그저 두루뭉술한 기분일 뿐이다. 그걸 모호한 덩어리로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딘가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아마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함은 이런 것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