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이 문을 닫다니!

엄마와 치매와 함께 22

by 길 위에서

엄마는 요양원에서 비교적 잘 지내고 계셨다.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나는 새 직장을 얻고 이사도 했다. 요양원과 내 집은 대중교통으로 왕복 5시간쯤 걸렸다. 집 가까이 엄마를 모실 만한 곳을 알아보기도 했으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겪을 혼란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졌다. 주말마다 오가는 시간이 부담스럽고 불편한 문제는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2018년 1월 4일에 ㄱ요양원에서 문자가 왔다. 1월 31일 자로 폐업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족도가 높은 요양원이 문들 닫는다고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양원 관련 법이 바뀌어 운영이 힘들다는 말도 들렸다. 결국 수익성이 나은 요양병원으로 바꾸기로 한 것인지 사정은 알 수 없었고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ㄱ요양원처럼 병원과 붙어 있는 시설을 원했지만, 요양센터장이 그런 곳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병원 입원실에서 지내다가 요양병원으로 갈 수도 있어 서두르지 않고 다른 요양원을 계속 찾아봤다. 마음에 드는 곳 찾기가 쉽지 않았고 괜찮은 곳은 대기자가 많았다.


그때 친구가 자기 어머니가 계시는 ㄴ요양원을 권했다. ㄴ요양원은 내 직장과 비교적 가까웠다. 친구 어머니는 여러 시설을 전전하다가 그곳으로 가신 후 아주 만족하셨고, 요양병원과 한방병원이 바로 옆 건물에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상담 신청을 하려고 ㄴ요양원에 전화를 걸었다. 대기자가 너무 많으니 방문할 필요도 없고 일단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주겠다는 답만 돌아왔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무작정 찾아갔다. 시설도 눈으로 확인하고 원장도 직접 만났으나 대기자가 많다는 말만 또 들었다.


그러는 사이, ㄱ요양원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다른 시설로 가는 어르신들이 퇴소하고 요양보호사들도 일자리를 잃게 되는 상황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마도 불안해 보였다.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몸으로 느끼셨을 것이다. 창가에 있는 엄마 침대에서는 길 건너 나지막한 언덕이 눈에 잘 들어왔다. 겨울로 접어들 때부터 산에 죽으러 간다는 말을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어수선한 탓인지 그 말을 부쩍 자주 했다. 그 무렵, 요양보호사가 내게 알려줬다. 엄마가 산에 가서 먹을 거라고 하며 식사 쟁반을 엎었고, 죽을 거라고 끼니를 거른 적도 있었다고 했다. 엄마가 너무 완고해서 다시 권하지도 못했는데 배가 많이 고프셨는지 그다음 식사 때는 잘 드셨다고 했다.


요양원 폐업을 하루 앞두고 엄마는 임시로 6인용 입원실로 옮겼다. 이제 요양병원 체계로 바뀌어 요양보호사가 아니라 간병사가 돌봄을 담당했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간병사 한 명이 6 분을 돌보았다. 돌보는 손길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데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걱정스러웠지만 서두르기보다는 신중하게 다음 요양원을 찾아보는 편을 선택했다.


엄마는 죽으러 간다는 말을 계속했다. 어떤 날은 내가 가져간 귤과 바나나를 드시고 나서 그게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날 죽으러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날은 나보고 “저 산”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나는 날씨가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면서 다음날 가자고 했다. 이 고비를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 머리가 멍했다.


방문 후 10일쯤 지났을 때 ㄴ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한 자리가 갑자기 비었는데 당장 올 수 있느냐고 했다. 뜻밖에도 빨리 온 연락이 반가웠지만 고민도 컸다. 4년 동안 믿고 의지하던 주치의를 떠나는 것도 주저되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일에 걱정부터 앞섰다. 그래도 요양병원보다 요양원이 더 낫겠다고 판단하고 위험 부담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엄마는 24년을 지낸 제2의 고향을 떠나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수도권 남부 도시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게 되었다.


이송 날짜가 정해졌다. 이제 엄마를 어떻게 모시고 가느냐가 고민이었다. 엄마는 왼쪽 고관절 골절로 오른쪽 다리만 살짝 디딜 수 있어서 승용차나 택시 태기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사설 응급차를 불러도 짐도 챙겨야 하니 혼자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자주 연락도 못 하고 지내는 사촌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촌동생은 흔쾌히 와 주겠다고 했고, 자기 차가 밴이니까 응급차를 부르지 말고 다 같이 그 차로 움직이자고 했다. 늘 씩씩해 보이는 사촌동생이 와 준다고 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입을 옷도 문제였다. 2월 말이었지만 상당히 추웠다. 엄마는 같은 건물 안에서 4년을 지내면서 환자복만 입었고 오래전에 입던 옷은 적당하지 않아 따뜻하게 입을 옷이 새로 필요했다. 집 근처 내의 가게에서 두꺼운 수면 잠옷을 급히 샀다. 제일 큰 치수는 제품이 없어 중간 치수로 샀다. 엄마가 워낙 마른 체형이어서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옷을 저녁에 세탁하고 밤새 말렸다. 내의와 양말도 챙겼다.


이송 당일, 다른 곳으로 갈 거라는 내 말에 엄마는 선선히 따랐다. 늘 말하던 대로 죽으러 산에 가는 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달려와 준 사촌동생을 엄마는 알아봤고 신기하게도 이름까지 말했다. 옆에서 보던 나도 기뻤다. 누군지 알아보는 것만큼 좋은 선물은 없었다. 엄마는 나이 든 여자에게 꼭 하는 질문을 사촌동생에게도 했다. “너는 애가 몇이냐?” 사촌동생은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먼저 엄마 옷을 갈아입혔다. 새로 산 옷이 품은 넉넉했지만 팔다리가 긴 엄마의 팔목과 발목을 충분히 덮지 못했다. 양말과 장갑으로 틈을 막았다. 외투 대신 담요를 숄처럼 두르고 내 머플러로 머리를 감쌌다. 그날따라 미세먼지가 심해서 마스크까지 썼다. 엄마는 완전무장 상태가 되었다. 간호사와 인사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인지 치료사들이 여러 분 달려왔다. 이삼 년 동안 엄마를 가까이서 도와주신 분들이었다. 선생님들은 섭섭하다고 말하면서 밝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엄마도 깍듯이 인사했는데 얼굴이 무표정했다. 그 광경을 보던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맙기도 했고, 4년 세월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마침 쉬는 날이어서 함께 와준 제부가 엄마를 안아서 운전석 뒷좌석에 앉혔다. 드디어 출발했다. 자유로를 달리다가 왼쪽에 늘어선 차들을 보았다. 한강 다리를 건너가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었다. 그 지역이 낯선 제부는 긴 줄의 끝을 지나쳐 나아갔고 결국 앞쪽에서 끼어들어야 했다. 나는 마음을 졸였다. 역시나 교통경찰이 우리 차를 세웠다. 엉겁결에 제부는 급히 환자를 모시고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경찰은 뒷좌석에 있는 창백한 얼굴의 엄마를 들여다보더니 우리를 그냥 보내 주었다. 모두 안도했다.


한강 다리를 건너고 나자 길이 몹시 막혀 차는 엉금엉금 기어갔다. 엄마는 한 시간 훨씬 넘게 앉아 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지 않고 잘 버텨 주었다. 가끔 창 밖을 보면서 “아파트가 엄청 많네.”라고 하셨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를 수없이 지났다. 늦어도 5시 반까지 도착하려고 넉넉히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6시가 거의 다 되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간호팀장과 요양보호사들이 우리를 맞았다.


엄마는 낯선 곳에서 약간 긴장한 듯했지만 거부감이나 불안감이 커 보이지는 않았다. 4년 전보다 치매가 더 진행된 탓에 오히려 환경 변화에 무디어진 것 같았다. 낯선 환경에 적응할 일이 큰 걱정거리였는데 말이다. 나는 따뜻한 물부터 달라고 부탁했다. 먼 길을 이동하면서도 미처 마실 물을 챙기지 못해서 두 시간 가까이 엄마는 물을 마시지 못했다. 그분들이 엄마를 살피는 동안 나는 사회복지사와 함께 입소 절차를 밟고 계약서에 서명하고, 챙겨 간 진단서와 복용약 등을 간호팀장에게 전달했다.


엄마의 침대는 창가에 있었다. 잘 주무시라고 인사하고 나오면서 엄마가 첫 밤을 무사히 보내시길 기도했다. 우리의 이송 작전은 무사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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