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현실을 알아차린 순간
눈을 떴다. 벌써 8시. 사촌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 열차역에 가려면 9시 23분 지하철을 타야겠다고 어젯밤에 미리 지하철 시간표를 확인해 뒀는데, 새벽에 깨서 뒤척거리는 바람에 늦잠을 잤다. 9시 좀 넘어 집에서 나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얼른 씻고 냉장고에서 꺼낸 삶은 계란과 두유와 사과를 먹으며 시계를 계속 봤다. 나는 아침을 건너뛰지 못한다.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고 해야 하나?
시계를 수시로 봤다. 늦을까 봐. 커피를 포기할까? 아니 그럴 수도 없다. 원두를 필터에 올려놓고 전기 주전자를 켜고 일단 옷을 갈아입었다.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는데 스웨터를 찾아 입을 시간은 없어 눈에 띄는 두툼한 외투만 얼른 꺼냈다. 이렇게 시간에 좇길 때 가슴이 뛴다. 사촌과의 약속에 조금 늦는 게 무슨 큰 일이라도 되는 듯이. 그 와중에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고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승강장으로 가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전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숨은 차올랐지만 안심했다.
열차역까지 가려면 1시간 넘게 걸린다. 종점에서 출발해 막 도착한 전철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여유 있게 숨 돌리고 눈도 감고 쉬다가 사촌도 이제 열차를 탔을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순간 뭔가 이상했다. 멍했다. 눈을 깜박이고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엥? 11시 반쯤 도착하면 되는데 나는 10시 반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한 시간 일찍 나온 것이었다.
몇 달 전에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만나기로 한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너무 일찍 왔다고, 근처를 구경하고 있을 테니 도착하면 전화 달라고 했다. 둘이서 자주 만나는 곳인데 왜 그러셨을까 의아했는데 비슷한 실수 아닌 실수를 나도 한 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시간 계산을 잘못해 놓고 그 틀 안에 갇혀 아침에 얼마나 허둥댔던가.
정신을 조금 더 차리고 나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런 착각이 이번만은 아니겠다 싶었다. 이와 비슷한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린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십여 일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늘 쓰는 종량제 봉투에 들어가지 않는 큰 물건을 버리려고 대형 쓰레기봉투를 샀다. 더 버릴 게 없을까 하고 찾다가 몇 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베갯속 하나를 버리기로 했다. 베갯속을 쓰레기봉투에 밀어 넣던 중에 모서리의 박음질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하얀색이었을 천은 노르스름했고 네 귀퉁이가 살짝 말려 있었다. 갑자기 재봉틀 발판을 굴리며 박음질을 하던 수십 년 전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동작을 멈췄다. 가슴이 콱 막혔고 손이 좀 떨렸다. 베갯속을 그대로 쓰레기봉투 옆에 내버려 두고 그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버릴지 말지는 하룻밤 자고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금껏 내 손으로 없앤 엄마 물건이 얼마나 많으며 엄마가 만든 물건도 사진도 여럿 집에 있는데 베갯속 하나에 이렇게 속이 뒤집어지다니! 내 감정에 내가 난감했다. 엄마 일주기를 지나면서 마음이 좀 힘들기는 했으나 잘 넘어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말이다.
다음날 조심스럽게 베갯속을 들고 박음질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돌돌 말려 있는 천 쪼가리를 발견했다. 그걸 펴 보니 인쇄된 글씨가 나타났다. 일부는 흐려져 읽을 수 없었지만 베갯속이 공장에서 만든 물건임을 증명해 주기에는 충분했다. 엄마가 직접 만든 게 아니란 말이지? 현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얼굴이 저절로 웃었다. 허 참! 아무도 나를 속인 사람은 없었다. 내가 나한테 속았구나.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 건 당연하겠지. 그건 그거고, 내 착각이 만들고 부풀린 감정에서 바람을 빼는 건 또 다른 일이다. 나는 하룻밤 무거웠던 기운을 털어내며 베갯속을 쓰레기봉투에 밀어 넣었다.
어이없는 순간은 한 번 더 있었다. 시간을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한 시간 일찍 나갔다고 생각한 날, 집에 돌아와 내 손으로 써 놓은 메모를 발견했다.
전날 시간 계산에는 전혀 잘못이 없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 탓에 괜히 급했던 마음 때문이었는지 미리 제대로 확인해 둔 10시 23분을 9시 23분으로 굳건히 잘못 기억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