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슬퍼하고, 행복했던 순간들도 잘 기억해
8월 초순의 햇볕이 뜨겁던 날, 공간 채비에 들어섰다. 오후에 조문객을 맞이하고 저녁에는 추모식이 열릴 공간이었다. 고인은 뇌출혈로 쓰러진 후 회복하지 못해 장기를 기증하고 17년 삶을 마무리한 고2 학생이라고 들었다. 그 사연만 듣고도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그날 ‘채비장례’ 도우미로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채비장례는 내가 가입한 상조협동조합에서 제공하는 작은 장례를 일컫는 이름이다. 나도 엄마의 장례를 채비장례로 치렀지만 도우미로 참여하기는 처음이었다. 몇 해 전 조합원 교육에서 추모식이라고 부르는 의미를 들었다. 사전적 의미에서 추도는 고인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이고 추모는 고인을 그리며 생각하는 것으로, 둘은 조금 차이가 있다. 채비장례는 유족이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날은 오후에 조문객을 받고 저녁에 추모식을 할 예정이었다.
정오쯤 도착했을 때 공간 채비는 조문과 추모식 준비로 분주했다. 유품을 전시할 테이블이 마련되었고, 헌화할 꽃도 한 편에 놓였으며. 사진으로 만든 영상이 큰 스크린 위에서 돌아갔다. 고인은 한쪽 벽면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 공간에 함께 머물렀다. 입구에는 고인을 소개하는 조문보가 놓였다. 아빠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샌드위치와 음료는 냉장고에 챙겨 넣는 일부터 하고 커피 머신 사용법을 배웠다. 조합의 부장님이 조문과 추모식 전체를 안내하실 터였고, 조문객 접대를 돕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유족들이 도착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 챙겨 온 유품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고, 공간 가운데 있는 기둥에 끈을 매달고 사진들을 걸었다. 그리고 고인의 플레이 리스트 음악이 흐르게 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헌화를 마친 조문객에게는 마지막 인사말을 ‘메모리얼 포스트’에 써서 문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메모리얼 트리에 달아 달라고 부탁했다. 인터넷고등학교를 다닌 고인은 후배와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은 활발하고 따뜻한 아이였음이 분명했다.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 헌화 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들도 많았다. 서른 명 정도면 여유 있게 추모식을 치를 만한 공간에 저녁 추모식에는 그 두 배를 훨씬 웃도는 사람들이 모였다.
고인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은 고1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의젓했다.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부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는 직접 조화를 건네며 안내도 했고, 나서서 음료와 샌드위치를 챙겨 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동생은 상주 역할을 했다.
조용한 공간에 갑자기 어떤 소리가 울렸다. 짧은 비명 같기도 했고 울음 같기도 했고 뭔가를 삼키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난 메모리얼 트리 쪽을 바라보니, 동생이 메모리얼 포스트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마침 바로 옆에 있던 엄마가 조용히 아이를 안아주었다. 시원하게 울지도 울음을 완전히 참지도 못하는 아이를 엄마는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따라 나가 크게 소리 내어 울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도우미 자리를 지켰다.
집에 돌아온 나는 물로만 대충 씻고 쓰러졌다. 무더위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정신을 잃듯이 잠에 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전날의 여파로 허리까지 뻐근했다. 조문객이 많아 첫 도우미 일의 강도가 높았다. 멍한 가운데 천천히 움직이며 집안을 정리하고 다시 샤워를 했더니 정신이 좀 들었다.
아이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 번 안아 줘도 되느냐고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뒤늦게 혼자서 그 아이 이름을 불렀다.
OO아,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마, 아빠에게 힘이 될 거야. 많이 슬퍼해도 돼. 소리 내서 울고 싶을 때는 꼭 그렇게 해. 지금은 마음 아픈 일만 떠오르겠지만 차차 좋았던 일들도 많이 생각날 거야. 네 형이 좋은 형이었다면 그건 네가 예쁜 동생이었다는 뜻이기도 할 거야. 형이랑 행복했던 순간들을 잘 기억하면 좋겠어.
이런 말들이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흘러 다녔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떠오른 건 한참 후였다. 내가 오빠를 잃은 것도 고1 때였다. 어느 순간 눈물이 터졌다. 말없이 OO이를 안아 주면서 사십 년 전의 나를 안아주고 싶었던 거구나. 내 울음은 금방 그쳤지만 OO이 모습은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렸다.
형이 없는 첫여름과 첫가을을 보내며 단단해졌을 그 아이를 생각한다. 한 번 더 말해 본다. 울고 싶을 땐 맘껏 울고, 또 행복했던 순간들도 잘 기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