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빛깔

룸 넥스트 도어가 건넨 질문

by 길 위에서

(영화의 장면과 내용이 글에 언급됨을 미리 밝힙니다.)


친구인 두 사람이 죽음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는 짧은 소개글만 보고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궁금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조금 당황했다. 화면 속 장면들의 강렬한 색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자극이었다. 작가인 잉그리드의 팬 사인회를 천정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장면에서 책 표지의 파랑, 빨강, 연노랑의 대비가 눈에 확 들어왔다. 잉그리드가 암 투병 중인 옛 친구 마사를 병실로 찾아간다.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에서 병실의 벽과 소품, 그리고 환자인 마사가 입은 옷의 색감은 더욱 강렬했다. 빨강, 초록, 파랑, 보라 등등 온갖 생생한 색들이 강한 대비를 이루며 화면에 등장했다. 시각적 충격은 계속되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넣고 영화를 보러 가서 그랬을까? 영화를 만든 알모도바르 감독이 선명한 색채로 유명하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눴고, 마사의 삶을 통과한 사건들이 눈앞에서 지나갔다. 남자 친구의 베트남전 참전과 트라우마, 재회와 임신, 종군 기자 활동 등등. 마사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딸과의 관계였다. 아빠에 대해 사실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할 정도로 관계는 단절되었다. 마사는 자신의 몸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데도 심장만큼은 튼튼하게 뛰고 있음에 절망하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마지막 여행에 동행해 줄 것을 잉그리드에게 부탁한다.


잉그리드에게 죽음은 공포다. 마사의 부탁은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그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거절한다. 그랬던 잉그리드가 곧장 마음을 바꾸고 그야말로 ‘죽음 여행’인 시간에 함께한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경계 태세를 갖추고 마사 방의 문을 바라본다. 연노랑의 벽에 달린 빨간 문이다. 안정제를 삼켜 가며 눈을 부릅뜬다. 그렇게 잉그리드는 죽음을 직면하려고 애쓴다. 나 또한 죽음의 목격자가 되는 듯이 온몸이 긴장된 가운데 두 눈은 색채에 놀라며 영화에 푹 빠져 두 시간을 보냈다.


영화의 여운은 진하게 남았다. 이상하게도 대사와 자막과 줄거리의 기억은 빠르게 옅어졌고 여러 장면들이 그림처럼 마음에 남아 말을 걸었다. 마치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으로 가득한 화보가 머릿속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림들의 색은 한결 같이 강렬하고 생생해서 생명력이 가득했다. 뉴욕의 빌딩 숲이 보이는 커다란 창 밖으로 분홍빛 눈이 내린다. 진분홍 티셔츠를 입은 마사가 올리브그린색의 기다란 의자에 똑바로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있고, 짙푸른 스웨터를 입은 잉그리드가 빨간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그를 바라본다. 마지막 순간을 선택한 마사가 거울 앞에서 노랑 정장을 차려입고 입술을 새빨갛게 칠한다. 잉그리드 차의 사이드 미러에 마사 딸이 걸어오는 모습이 비치는데 그가 정장 속에 입은 빨간 옷이 새빨갛다.


이런 장면들이 생생했다. 강하게 대비되는 찬란한 색채들이 죽음과 생명의 대비 혹은 생명 자체를 연상시켜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미지와 함께 몇 주를 보낸 끝에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죽음의 빛깔은 뭐지? 죽음의 빛깔? 검은색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이 연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음이 꼭 검어야 하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나는 구체적인 죽음을 생각해 봤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했다. 희뿌연 색이 떠올랐다. 돌아가시기 전날 병자성사를 받으셨을 때 아버지는 고개를 움직이지 못하셨지만 눈을 가늘게 뜨셨다. 살짝 벌린 눈꺼풀 사이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버지는 신부님의 목소리를 들으셨을 것이고 천정에서 쏟아지며 중환자실 공기 속에서 산란되는 빛을 보셨을 것이다. 아버지 죽음과 연결된 내 기억의 빛깔은 뿌연 하얀색이다.


다른 죽음도 있다. 오래전에 가슴 깊이 묻고 콘크리트를 덮어 밀봉해 뒀다. 빛이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은 검을 수밖에. 세월이 흘러 마침내 콘크리트에도 균열이 생긴 듯. 그 틈에 빛을 비춘다면 무슨 색이 보일까? 아직은 그 빛깔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더 이상 깜깜한 검정은 아닌 것 같다. 들여다볼수록 빛깔이 변할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조심조심 계단을 오르며 마사의 방문을 올려다보던 잉그리드처럼, 그 죽음에 다가가 보려고 한다.


죽음의 빛깔이라는 질문을 건넨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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