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살아나는 것

상실을 넘어서는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

by 길 위에서

2024년에 본 영화 중 한 편만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말하겠다.


영화 포스터는 눈을 감고 있는 젊은 여성의 얼굴로 채워져 있다. 실제 영화는 나이 든 주인공 남성이 눈을 천천히 지그시 감으면서 끝난다. 3시간 가까운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 화면이 완전히 검어질 때까지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조명이 들어오자 겨우 생각했다. 거장의 영화구나.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후 영화 속 장면들이 수시로 떠올랐는데, 두서없는 생각을 글로 옮겨 보려 하면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왜 그랬는지 억지로 표현해 보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나무가 바람을 맞고 있다. 이파리의 떨림이 가지와 줄기를 거쳐 땅속 깊이 뿌리 끝까지 전해진다. 줄기와 뿌리의 흔들림은 눈에 띄지 않지만 감지되는 깊은 울림이 있다.


영화는 ‘작별의 눈빛’이라는 영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 촬영 도중에 주연배우 훌리오가 실종되고 감독 미겔은 영화를 그만둔다. 22년 후 미겔은 실종 사건을 다루는 탐사 프로그램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옛 자료와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를 찾아가고 옛 인연들을 한 명씩 만난다. 함께 영화 작업을 한 촬영기사 친구 맥스, 어렸을 때 아빠 훌리오를 잃은 딸 아나, 그리고 훌리오와 자신이 차례로 사귄 적이 있는 옛 연인 롤라까지. 어촌에서 가끔 고기를 잡고 번역 일을 하는 일상으로 돌아간 미겔에게 훌리오로 짐작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미겔은 그 사람이 있는 요양원으로 달려간다.


22년 만에 훌리오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과거를, 실종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지 않는다. 그가 왜 사라졌는지, 어떻게 낯선 동네로 흘러 들어갔는지 묻지 않는다. 그 시간의 결과인 현재에 머문다. 나는 이 점이 좋았다. 미스터리처럼 전개되는 전반부에서도 미겔이 만나는 사람과 미겔을 아주 가까이서 보여주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마주 보는 두 사람만으로 가득 채워진 화면을 보고 있으면 나도 그 대화에 함께하는 듯했다. 때로는 카메라가 그중 한 사람의 얼굴만을 크게 보여주어 마치 내가 그 말을 듣는 유일한 사람인 듯한 착각도 들었다. 영화에서는 비 내리는 날이 꽤 많았는데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눈앞의 두 사람과 내가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공간을 그 빗소리가 감싸주어 더욱 대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다시 훌리오가 발견된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훌리오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휠체어를 고치고 시설을 정비하는 일을 혼자 도맡아 해낸다. 요양원에 크게 도움이 되는 쓸모 있는 사람이지만 표정은 반쯤 죽은 사람 같다. 훌리오를 진료한 의사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이 동네에서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미겔을 만난 의사는 훌리오에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가 “없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한다.


그는 과거의 기억이 하나도 없지만 틀림없이 훌리오다. 영화 소품으로 쓰였던 사진을 그가 간직하고 있고, 손재주가 뛰어난 현재 모습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겔은 요양원 점심 식사 자리에서 훌리오를 본다. 훌리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그의 시선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미겔을 그냥 지나간다. 그에게 미겔은 “아무도 아닌” 사람이고 그저 배경일 뿐이다.


미겔은 요양원에 머물며 훌리오 주변을 서성이고 가끔 훌리오에게 말을 건다.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 옛 훌리오의 흔적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다.


두 사람의 마음이 처음 오간 순간을 나는 이렇게 기억한다. 두 사람이 숙소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장면이었다. 미겔이 어떤 노래를 흥얼거린다. 옛적에 같이 불렀던 노래다. 훌리오의 몸이 서서히 미겔을 향하고 그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의 눈이 반짝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간다.


미겔이 한 발 다가가 도울 일이 없는지 묻는다. 훌리오는 한 명 몫의 일거리만 있다고 답했다가 미겔의 손을 들여다보고는 마음을 바꾼다. 일을 제법 해낸 사람의 손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둘은 나란히 사다리에 올라서서 회벽을 새로 칠한다. 그 앞의 빨랫줄에 널린 하얀 시트가 강하게 펄럭인다. 지금도 시트 펄럭이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회칠 장면.png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


이어서 나온 점심 식사 장면에서 훌리오가 음식 먹는 모습은 전과 확실히 다르다. 움직임도 표정도. 그가 이제 음식 맛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 입에도 침이 돌았다. 하얀 얼룩이 몇 개 띄엄띄엄 묻은 훌리오에 비해 미겔의 옷은 회반죽 얼룩투성이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수녀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미소는 내 얼굴에도 번졌다.


옛 기억을 완전히 잃은 훌리오를 위해 미겔은 특별한 상영회를 준비한다. 문 닫은 영화관을 빌리고 촬영기사 맥스를 불러와 완성하지 못한 영화 필름을 돌린다. 영화 속 자신의 옛 모습을 보면 훌리오가 뭔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인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딸 아나도 친구 미겔도 훌리오의 표정을 살핀다. 미완성 영화가 끝나자 훌리오는 눈을 감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이 뚜렷했다. 눈 감은 훌리오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세상이, 어떤 감각이 열리고 있었을까? 거대한 폭발과 같은 내면의 변화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훌리오는 여전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의 훌리오는 그전의 훌리오가 아니다. 마침내 무엇인가와 연결된 훌리오다. 이제 진짜 살아 있는 훌리오다.


이 영화에서는 상실의 사연이 여럿 나온다. 훌리오의 실종이라는 큰 사건 외에도, 미겔은 10대 아들을 잃었고 그 후 이혼했다. 아나의 어린 시절, 배우인 아버지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실종 당시, 훌리오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이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아나는 기억한다. 그에게 아빠는 빈자리다. 잘나가던 배우는 사라졌고 감독도 영화를 떠났다. 나는 이 쓸쓸한 사연들이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 사연들을 뒤로하고 영화의 흐름을 따라갔다. 영화가 그렇게 응시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이 영화에 뒤따르는 사연도 넘친다. 84세 감독이 31년 만에 발표한 신작, 평생 장편 영화 네 편을 만든 스페인 영화 거장, 1973년 영화 <벌집의 정령>에서 주인공 아나 역을 맡았던 배우가 훌리오의 딸 아나로 나왔다는 특이한 사실 등등. 찬사도 비판도 있다. 나는 영화의 역사나 기법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을 모른 채 그저 한 사람의 관객으로 영화를 만났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에리세 감독의 영화를 더 접할 기회가 거의 없어 아쉬웠을 뿐. 다행히 최근에 영화 <벌집의 정령>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두 마디에 불과하다. 아! 와아. 감상을 글로 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유쾌한 웃음도 없고 가슴 벅찬 감동 스토리도 없는 영화가 이토록 충만한 느낌을 남기는 것은 왜일까? 궁금했고, 오래 생각했다. 겨우 생각해 낸 답은 이거다. 조용히 상실을 넘어서는 느낌. 지금은 그렇게밖에 답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가 감사하다.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도, 빅토르 에리세 감독도, 아직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묘한 느낌들도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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