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시문학관과 적벽강, 채석강

서해안만 따라간 3일의 여행-둘째 날

by 길벗 스토리텔러

변산에 숙박한 날은 둘쨋날 아침이면 적벽강 지질 트레일, 저녁에는 채석강 지질과 일몰 구경을 나누어 배치한다. 하루에 최소 1만 보 이상 걷는 취미를 가진 나는 일행과 같이 가든 아니면 혼자 가든, 아침엔 적벽강을 걸어 한 바퀴 돌고 온다. 바다 풍경과 지질 관찰의 명소인 적벽강, 채석강은 모두 숙소를 기준으로 위아래 수 백m 이내에 위치하기 때문에 구경과 산보를 할 수 있는 최상의 장소이다. 이 날은 적벽강 산책을 마치고 아침 식사하던 루틴을 바꿔, 아침 식사 후 차를 가지고 나가 적벽강을 트레킹하고 바로 고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녁에 고창에서 들어오는 길에 채석강 일몰을 감상하기로. 수년 전만 해도 수성당 언덕은 황량했던 풍경 그대로도 아름다웠는데, 빈 땅에 유채꽃을 심고 신식 화장실을 만드는 등 환경 개선 작업에 힘을 쏟았다. 화장실 개선이야 고마운 일이지만, 포토 포인트 등 너무 인위적인 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어도 그냥 둘러보며 걸으면 아름다운 곳인데. 수성당은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대문도 설치해 놓았다.

적벽강 노을길 트레일/수성당/바다 풍경

개양할미 전설과 지질 명소

-적벽강과 수성당 언덕 -


수성당 옆 깊은 계곡의 찰랑이는 바닷물은 간신히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주변 대나무숲 때문에 바다 쪽 시야는 다 가려진다. 대나무숲은 최근 인위적으로 더 조성한 듯하다. 2년 전 이곳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니 현재 대나무숲에 의해 가려진 바다쪽 시야가 툭 트였었는데... 동네 이름이 '죽막동(竹幕洞)/대막골-대나무 막을 두른 동네'이라 하니 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방편인가. 이곳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후박나무'숲이 있고, 그에 대한 소개 표지판도 서 있다. 수성당(水聖堂과 水城堂이 섞여 쓰이지만 水聖堂으로 쓰인 문헌이 많다고 함)은 전라북도 부안, 고창, 영광-3개군의 앞바다- '칠산바다'-의 신으로 모시는 '개양할미'와 그녀의 딸 8자매에게 당산제를 지내는 사당이다. 개양할미는 이 바다의 풍랑의 다스리고 어부들과 선박을 보호하는 수호신이시다. 최근까지도 당산제를 지내던 성소인데, 1992년 수성당 주변 발굴 조사에서 3~7세기 경의 토기 등이 대량 발견되었다. 그런데 발굴 유물들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고 짐작하던 마한, 백제 것만 아니라 가야, 통일신라 시대, 조선의 것은 물론 일본과 중국의 토기-주로 제기(祭器)-까지 다수 포함되면서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고대 해상 무역이 한반도 서해안 따라 연안 항로(沿岸 航路)로 중국과 우리 땅과 일본을 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신안 해저 유물을 통해 밝혀진 바 있지만, 수 세기에 걸쳐 이 연안 항로를 이용한 여러 나라의 제관들이 이 곳에서 해상 교통 안전을 비는 제사를 올렸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발굴된 것이다. 그래서 해안 절벽 위 수성당이 있는 곳-'죽막동'-에서 발굴된 유적은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낸 해양 유적으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기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재 신청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육중한 문 안에 서 있는 수성당 당집은 상량문에 '조선 순조 4년'이라 쓰여 있어, 1804년에 새로 지었고 이후 몇 차례 중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굳게 닫힌 문을 뒤로 하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지질 명소 적벽강' 해변으로 내려갈까 생각하다 갈길 서두르기로 했다. 해변에 안 내려가고 내려다 보며 걷기만 해도 좋은 곳이니.


오늘의 목적지 중 가장 집중할 곳은 고창(高敞)의 부안면(富安面) 선운리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인데, 거기서 미당과 그의 시를 외국인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과제이다. 미당 서정주하면 어느 한국인이 모르리오만, 이런 대시인의 시적 정서, 문학적 과업, 지식인으로서의 공과(功過) 등은 문학에 관심 없는 한국인에게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부안(扶安)에서 고창 오는 줄포만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과 마을과 시골집 등 한국적 풍광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바다야 어디든 아름다운 풍경이니 그렇다 치고 산 밑과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Greg은 아름답다는 의미의 영어를 다양한 단어로 외친다. '프리티, 뷰티풀, 오썸, 원더풀' 등이다. 나도 오랜만에 보는 어린 시절 고향 풍경이라고 설명했을 때, 그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어 못하는 나의 말을 여행지기인 오교수가 통역하면서 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보탰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

- 미당 시문학관 -

(위) 초등학교 분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미당시문학관' (아래) 옥상에서 본 줄포만과 마을, 실내의 미당 흉상


‘미당 시문학관’은 서정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질마재’에 조성한 문학관이다. 질마재는 그의 고향인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와 옆마을 오산리를 잇는 고개라 한다. 찻길 곁에 동네 이름을 알리는 표석에는 ‘안현마을’이라 써 있다. 안현(鞍峴)은 ‘길마 안, 고개 현’이니 길마 즉,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얹는 나무 도구 닮은 고개라는 뜻이다. '길마'가 가운데가 솟은 모양이니, 어느 언덕이나 고개 보고 길마 모양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말일 것이다. 서울의 무악재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 건너편에 있는 안산(鞍山)도 조선시대에는 안현(鞍峴)이라 불렀다. '이괄의 난' 때 반군과 관군의 최종 결전이 벌어진 진 곳이라 ‘조선왕조실록’ 특히 ‘인조실록’에 안현(鞍峴)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한자로 '鞍峴', 순우리말로 ‘길마재’라는 고개나 언덕은 많은 지역에 있는 것이다. 그 길마재가 전라도 사투리로 구개음화되어 ‘질마재’로 불리는 것이다. 어쨌든 그 유명한 ‘질마재’를 걸어보려 했는데 그냥 우리가 차로 지나온 길고 얕은 도로가 그 곳이라 하니 다소 섭섭했다.


‘질마재 신화’는 미당(未堂)의 여섯 번째 시집으로, 고향 질마재의 풍속과 설화를 전통적이고 토속적 언어로 꾸며낸 산문 시집이다. 여러 문예지에 수년 간 발표한 작품들 45편을 엮어 1975년 상재(上梓)했다고 한다. 설화와 전설도 재미 있지만, 시인의 외할머니, 어머니의 캐릭터를 포함 가족사와 질마재, 줄포 바다 관련 이야기 등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 있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詩’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예전 문 닫은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문학관. 운동장에서 가운데서 바라본 교사(校舍) 중앙 쯤에 한자로 ‘未堂 詩文學館(미당 시문학관)이라는 표석이 있고 그 것과 짝을 이뤄 서 있는 시비(詩碑)엔 동천(冬天)이 새겨져 있다.


문학관 안에 들어서니 손님은 없고 문화해설사님들이 대화를 나누시다가 반가이 맞아주신다. 사실 나는 거의 십 년 간격으로 세 번째 방문하는 사람이라 두 번째에 비해서도 놀랍도록 시설이 좋아졌다는 감회를 피력했더니 문학관 환경의 비약적인 개선에 대해 설명해주신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초등학교 건물 그대로 두고 복도에 액자만 걸어놓은, 매우 낡고 유치한 수준이었음을 오히려 이분들은 잘 모르셨다. 안내를 받아 옥상까지 오르는데, 층고가 높아질수록 계단이 좁아지면서 내려다 보이는 공간은 넓어지는 조형미, 층과 층 사이에 자리 잡은 전시 공간, 공간과 공간 사이를 개구부(開口部, Opening)를 통해 들여다 볼 수 있게 한 배치... 주제들이 개별적인 듯, 하나로 연대(連帶)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삼면의 벽에 스무 개 안팎 액자 속에 '친일 작품'만 따로 전시해 놓은 공간도 있었다. 여기서 난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伍長頌歌)‘에 대해 일행에게 아는 대로 설명해주었다. 서정주가 1944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작품으로, 가미카제(자살 특공대)가 되어 죽은 조선인 청년 '마쓰이 히데오'를 찬양하는 글이다. '마쓰이 히데오'는 1924년 개성 출생의 '인재웅'이란 조선인의 일본 이름이다. 소년 비행병으로 ‘오장(伍長)’이란 계급(우리나라식으로 하사 정도?)을 달고 1944년 11월 29일 레이테만에서 미군함에 돌진한 ’카미카제‘ 특공대원이었다. 결국 가미카제의 개죽음을 애국적 행위로 미화하고 학생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홍보물인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부터 1945년 독립까지 40년을 일본의 식민지로 살았으니, 1915년 태어난 그의 불행이요, 민족의 불행이기도 하지만, 어쨌든시인(詩人)의 작품, 인간적 풍모와 함께 문학적 공과(功過)를 모두 알리고 판단은 독자가 하는 게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당시문학관 이모저모


절정인 옥상에서 바라보는 질마재 마을의 전망과 그것을 각별하게 바라볼 수 있게 시멘트 난간에 개구부를 설치한 점이 정말 좋았다. 옥상에는 녹지 않은 눈이 얼음져서 망설여졌지만 나가 보니 너른 동네와 전답, 그것 너머 멀리 줄포 바다 풍경이 눈호강시켜준다. 해설사님께서 바람 많고 안개 많은 곳이라 줄포만 바다가 가까워 보여도 선명하게 보이는 날이 드문데 '여행운'이 있으시단다. 왼쪽으로 보이는 마을 가운데 그가 태어나고 자란 초가집이 보이는데 그 집을 둥근 개구부를 통해 보는 느낌은 한층 포근하다. 줄포 바다 방향 오른쪽 언덕에 대숲이 우거진 곳, 그 뒤편에 시인이 가족들과 함께 묻혀 있다고 한다. 그 대숲은 네모진 개구부를 통해 보니 더 아늑하고. ’미당시문학관‘은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가 폐교된 후 교사(校舍)를 개보수(改補修)해 건립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여기가 질마재 저쪽 '봉암초등학교의분교'였음을 이해했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는 미당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미당 부친의 직업은 사실 종이 아니라 대지주의 마름이다. ’그거나 그거나‘하는 심정에서 시적으로 퉁쳤다고 보면 될 것이나, 마름과 종의 신분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마름은 소작인들을 관리하는 사무장 같은 직업이지만, 종은 지주에게 완전히 예속된 준 노예 신분이라는 것쯤은 다 안다. 아버지 ’서광한(徐光漢)이 나름 안정된 생업이 있었기에 경성의 ’중앙고보‘로 유학도 보내고, 학생운동 사건으로 퇴학당한 그를 ’고창고보‘로 또 입학시키는 등 당시 꽤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미당의 고향은 정말 바람이 많은 부는 동네였다. “팔할이 바람이었다”는 싯구는 삶의 기억을 상징적으로 회고한 것이기도 하지만, 고향 줄포 바닷가 마을의 현실이기도 했을 것이었다. 기온은 영상이지만 꽤 차가운 바람이 쉬지 않고 불었다.


서정주를 전혀 모르는 Greg도 일단, 그 오래 전 한국 문학이 영문 번역이라는 걸 제대로 시도해보지도 못하던 시절에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토속적, 샤머니즘적, 민족적 정서로 시를 지으신 분이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경외감을 표했다. 시인과 그의 대표적 시에 대한 영역본(English translation version)을 암만 검색해도 마땅한 것이 안 나와 아쉬웠다. 친일 문제와 작품, 해명의 아쉬움까지를 모두 설명했는데도, 그는 시인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국화 옆에서’의 시적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이 시를 외우던 어린 시절로 되돌려놓는 주술같은 싯구이다. 이걸 어떻게 번역해서 미국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귀촉도, 화사, 문둥이, 신라초, 자화상, 푸르른 날’, 제목부터 맛나게 번역할 수 있겠나?


'소리로 세상을 품은 판소리의 여왕"

- 김소희 생가 -


‘질마재로’를 반대로 넘어 부안쪽 으로 나가는 길 가에 김소희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기념관이 아니니만큼 본채 포함 세 동의 초가가 있고, 본채 마루 한가운데 선생과 선생의 가족 사진이 현판처럼 걸려 있는 그냥 볼거리 수준이다. (晩汀) 김소희(1917~1995). 우리나라 현대 판소리 예인(藝人) 중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이시며 국창(國唱)으로 추앙받던 레전드시다. 1930년 송만갑을 찾아가 입문한 이후 ‘춘향가’와 ‘심청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안숙선, 신영희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기도 했다. 1955년 박헌봉 선생, 박귀희 선생과 뜻을 모아 종로구 운니동에 세운 '국립국악학교'-오늘날 '전통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의 초대 교무주임으로 교육과정을 수립하는 현장 교육자였고 나중에는 제4대 교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정규 국악의 교육 행정가이기도 했다.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동편제와 서편제를 두루 아울렀던 국창(國唱)을 추억해보는 일은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수확이었다.

만정 김소희 선생의 복원된 생가


억새와 갈대들이 사는 갯벌

- 줄포만 노을빛 정원 -


고창군(高敞郡)과 부안군(扶安郡)은 최대 너비 7km에 17km 쯤 육지를 파고 들어간 줄포만(茁浦灣)을 마주보고 있는데, 줄포만 깊은 영역은 대부분 고창군 영역인데 정작 ‘줄포리’는 부안군 영역이다. 게다가 우리가 다녀오는 ‘질마재로’나 ‘선운리’가 속한 행정구역은 ‘고창군 부안면(富安面)’이라니, 나그네에겐 ‘扶安’과 ‘富安’도 엄청나게 헷갈리는 것이었다. 어쨌든 茁浦灣(줄포만)은 전라북도 부안군과 고창군 사이에 위치한 만(灣)으로, 수심이 얕아 썰물 때 간석지가 크게 드러나므로, 갯벌이 발달한 곳에 생태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한때 항구로 잘 나갔던 ‘줄포항’이 토사의 퇴적이 심해 수심이 얕아지면서 1938년, 항구 기능을 곰소항으로 넘겼으나, 한때 군산 다음으로 큰 어항이던 곰소항도 지금은 점차 갯벌 퇴적이 심해진다고 한다. 수산 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현실. 어업 중심지가 변산의 격포항으로 옮아가니, 이제는 바다가 아닌 갯벌이 주요 환경이 된' 줄포만 갯벌'은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우리나라의 26개 습지 중 하나가 되었다.

줄포만 노을빛 공원/갯벌생태관/생태관 내부/생태관 조망창에서 본 갯벌 공원


‘줄포만 갯벌 생태공원’, ‘줄포만 노을빛 정원’ 중 어느 것이 정식 명칭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바람이 하도 세게 불거니와, 일단 개요를 파악하고 걸어도 걷자 하고 생태관에 들어간 시간이 정확히 11시 50분이다. 로비 안에 들어서자 연구사로 보이는 분이 다가오시더니 12시부터 13시까지 점심시간인데 그 땐 운영하지 않으니, 13시에 다시 방문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잠시 멍했다. 점심시간에 문 닫고 전 직원이 식사하러 가는 전시관이라. 몇 마디 떠올랐으나 건물 안 쪽에 있는 ‘조망창’에서 갯벌 생태공원을 잠시 내려다보고 5분 내에 퇴장하겠다 하고 그대로 했다. 씁쓸했지만 이해가 되는 면도 있는 것이, 직원이 기껏해야 10~20명 이내일텐데, 구내식당도 근방에 음식점도 없는 외진 데라는 점이 그것이다. 점심 시간이기는 우리도 마찬가지. 공원은 넓어도 너무 넓고, 바람은 불어도 너무 불어대서, 철새를 관찰하는 ‘탐조(探鳥)’ 전망대에서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갈대와 억새들의 군무를 한번 더 조망하고 자리를 떠났다. 여기서 10분만 달리면 곰소항이다.


바다에 웅크린 곰 한 마리, 곰소

- 곰소항 -


곰소는 순우리말 지명이다. 내소사(來蘇寺)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능가산(楞伽山) 정상에서 보면 줄포만 가운데 가장 깊은 바다 주변 지형이 곰이 웅크린 형태라 하여 한자로 '웅연(熊淵)'이라 했든데 그게 순우리말 곰소가 되었다는 내용의 안내판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설명과 반대로 '곰소'를 어느 시기엔가 '熊淵'으로 한자화'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어쨌든 갯벌의 퇴적으로 점차 그 기능을 잃다고는 있지만, 아직은 전국구 젓갈의 성지다. 가을이면 선운사, 내소사, 내장산 등 일대 명산 단풍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 관광버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점심 드실 횟집, 김장용 젓갈 마련하시느라 젓갈집, 성업(盛業)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겨울철 평일이라 한가한 이 곳 유명한 대형 횟집에서 스물 몇 가지나 되는 회와 해산물로 반주 곁들여 점심식사를 마쳤다. 오기 전 음식점 검색하면서 살펴 보니 음식점들 보편적으로 2인 기본 가격이 12만원, 3인-4인 15만원 정도로 올라갈수록 저렴해지는 가격 구조다. 무조건 넷이 가야 싸게 먹는다. 메인(main)회에 따라 가격차가 있으며, 칼국수, 회덮밥, 물회 등 가벼운 단품 메뉴들도 완비되어 있으니 각자 사정에 맞게 드실 수는 있다.


바위가 터져 절터가 나왔다고?

- 개암사(開巖寺) -


‘개암사’는 ‘내소사’에 손색없는 천년 고찰이요 멋진 ‘우금바위’가 유명하지만, 전나무숲길 등 알려진 관광 자원이 많은 내소사에 비해 찾는 이가 덜한 편이다. 백제 무왕 35년(634)에 창건했다고 하는 개암사와 무왕 34년(633)에 창건했다고 하는 내소사. 불과 1년차? 믿기 어려운 것이 창건 연대와 설화, 창건한 인물이지만, 어찌 같은 지역의 두 사찰이 이렇게 비슷하게 설정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찻길에서 벚나무 가로수 사이로 놓인 진입로를 꽤 깊이 들어간 곳에 자리한 개암사는 그늘진 일주문부터 안쪽은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주차장은 일주문 곁에 크게 마련되어 있지만, 걷다 넘어질까 걱정도 되고 겨울철 신자도 관광객도 보이지 않는 터라, 넉넉한 절집 인심 믿고 차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섰다. 차로 통과한 일주문에는 ‘楞伽山 開巖寺’라 적혀 있었다. ‘능가산’이라. 저 산 너머 어디쯤인 내소사 일주문에도 ‘楞伽山 來蘇寺’라 현판이 붙어 있으니 우금바위 이쪽저쪽 모두 능가산이라는 말인데 좀체 방향은 잡히지 않는다. '우금바위'가 있는 개암사 뒷산을 '우금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능가산'이라 적혀 있는 것도 그렇고. 건립한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일주문(一柱門)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기둥이 금빛이고, 일주문 기둥을 거북이 석상이 받치고 있다. 탑비(塔碑)의 맨 아래, 비신(碑身)을 받친 귀부(龜趺)와 같은 형태이다. 사천왕문 앞 지나고 대웅전으로 오르는 불이교(不二橋)도 지나쳐 깊숙이 들어가 차에서 내렸다.

개암사 일주문과 대웅전 그리고 우금바위와 풍경들

대웅전 오르는 계단 양옆에는 눈이 쌓여 있고 대웅전 뒤편 ‘우금바위/우금암(禹金巖)'가 눈에 들어온다. 이 절 탄생 전설로는 ‘우금(禹金)’이라는 사람이 도술로 거대한 바위를 갈라 터가 열린 자리에 절을 지어 ‘우금바위’요, ‘개암사(開巖寺)’라는 전설이 가장 우세한 듯하다. 몇 가지 설화가 있으나 ‘우금 바위가 열려 생긴 터에 절집을 지었다’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등산을 하면 '복신' 장군이 백제 부흥 운동을 도모했던 '우금산성' 유적도 있고, 볼만한 동굴들이 여럿 있다고 한다. 우금바위 기운을 듬뿍 받고 절집을 나서 채석강으로 향한다. 일몰 보러.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 변산(邊山) 이야기 -


‘부안 여행’하면 대개 ‘변산반도 국립공원’을 방문하시는 분들의 여행 범위와 동일시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전국 국립공원 중 유일하게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범위를 자랑한다. 변산(邊山)은 본래 산지(山地)인 내륙 기준으로 볼 때 바닷가 즉, 변두리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나름 여러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산의 이름이 지역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면 무방하다. 하지만 지금은 의상봉, 신선봉, 쌍선봉 등 우람한 봉우리가 있는 쪽을 ‘내변산’이라 하고, 그 바깥쪽인 바닷가쪽을 ‘외변산’으로 구분해 부르고 있다. 내변산은 직소폭포 가는 트레일 내지 등산코스가 유명하고, 천년 고찰 내소사(來蘇寺)을 품고 있다. 외변산은 적벽강, 채석강 같은 지질 트레일에 3개 해수욕장, 격포항 등을 포함하며, 격포항에서 여객선으로 닿는 위도(蝟島) 등 주변 섬도 망라한 지역이니 범위와 다양성에서 국립공원 중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준익 감독의 '변산'이라는 영화도 있다. 반 건달인 학수(박정민 분)가 랩 가수 지망생으로 나오는데 전 장면을 통해 그가 부르는 랩의 가장 유명한 대목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은 배우 박정민이 직접 쓴 가사라고 들었다. 여주인공 선미(김고은 분)가 돌아가신 학수 어머니 무덤가에 앉아 바다에 깔리는 노을을 보면서 입술을 쭉 내민다. 학수가 묻는다. "너 시방 뭐허냐?", "노을한테 키스하는 것이여"


지질 이야기

- 채석강(采石江) -


채석강은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전설이 어린 중국의 명소로,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채석기(采石矶)의 풍광을 닮았다는 상상력에서 차용한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채석기는 장강(양자강) 연안의 절경으로 넓은 강물을 내려다보는 가파른 절벽이라 하며, 矶(기)는 한자로 물가의 바위를 뜻한단다. 이곳에서 뱃놀이 하던 이백이 술에 취해 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의 그 장소이기도 하다. 강(江) 풍경에서 이름을 빌어왔다고 하면, 바닷가에 있는데 왜 강(江)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에 대한 의문은 대부분 해소될 것이다. 아침에 산보했던 적벽강(赤壁江)도 송(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놀았다는 중국의 적벽강과 흡사하다 하니 격포해수욕장을 사이에 둔 두 지질 공원의 네이밍(Naming) 배경도 일관성이 있다.


채석강은 퇴적암층 봉우리인 ‘닭이봉’이 바닷물에 침식되어 수천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단면이 드러난 해식(海蝕) 절벽이 압권이다. 밟고 다니는 바닥까지 얇고 평행한 층리(層理)인데, 이 한 층이 퇴적되는데 걸린 시간이 얼마나 될까. 시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먹먹해진다. 사람 일생 참 보잘 것 없고. 바닥의 층리는 썰물 때만 드러나기 때문에 간만(干滿)의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밟아보지 못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부안 일대는 밀물과 썰물 때 해수면 차이가 평균 약 3~4m 정도로 꽤 큰 편이다. 이곳에서 격포해수욕장을 지나 바닷가 따라 걸으면 '소노벨 리조트' 뒷편 출입문 직전에 노을전망대가 있다. 서해안 노을이야 다 똑같고, 채석강이나 해수욕장이나 같은 해변인데 뭐 다를까 하지만, 사진을 담는 이에게는 귀에 담기지 않는 이야기다. 시야가 다르고, 기분이 다르고 다 다르다. 전망대에서 더 고갯길을 오르다 보면 늘어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지는 석양을 사진에 담을 수도 있다. "노을한테 키스"할 수도 있고....

채석강과 노을, 노을 전망대

(다음날 여정: 대천항-보령해저터널-안면도-간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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