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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Nov 20. 2017

직장을 옮깁니다.

꿈과 희망의 나라로

나는 꽤나 괜찮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괜찮은 실력과 괜찮은 작업물들로 디자인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세상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자 노력해 왔다. 그리고, 여전하다. 디자인은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자 의미이며, 세상에 내가 왜 있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내 삶이 의미를 지니는지, 나의 그릇은 어떤 그릇인지 어느 만큼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지 등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의 연속들이다. 


직장의 의미

15년 지기 친한 후배와 술자리를 가졌고, 거기서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근데요, 제일 좋은 방법은 돈 받으면서 깨지면서 배우는게 제일 효과적이더라구요
학생때는 돈을 주고 배우지만, 직장에선 돈을 받고 배우지요


그렇다. 내 생각은 그렇다. 직장은 배움의 터 이다. 삶은 배움의 연속이고, 겸손함을 일깨워주는 시간들의 연속이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건 삶을 풍족하게 살기 위함이고,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는 깊은 실력과 처절한 깨짐이 있어야 한다. 일을 잘 한다는 말들도 결국 많이 배우고 많이 써먹을 줄 아는 사람의 승리이다. 


물론, 30대 중반에 다다라서 자아 실현이니, 이상 실현이니 이런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적인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앉아 있을수만은 없다. 그래서 내가 정의하는 두번째 직장의 의미는 ‘내가 유용하게 되어지는 곳’ 이다. 나는 디자이너라는 정체성과 디자인 스킬들을 가지고 있고, 이런 스킬들이 쓸모 있는곳에서 쓸모 있어짐을 지향한다. 독특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관점을 제시하고 싶고, 내가 할 수 있는 디자인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지향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야기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본인의 직장 뒤에 숨는다고. 의사는 의사처럼 행동하길 원하고, 법관은 법관처럼 행동하며, 노숙자는 노숙자처럼 행동한다. 마그리트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그림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실제를 보려하기보다는 이미지가 강조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이 3년 뒤에 멸망한다고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와 백수생활 3년차인 옆집 아저씨가 동시에 똑같은 근거를 들이대며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물리학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며 조사하려 할것이며, 옆집 아저씨의 말에는 ‘헛소리 그만해요’ 라고 말할테다. 그만큼 실제의 모습보다는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라는 직함에는 무게가 실리게 되어 있다. 

마그리트 - 이미지의 배반 (1929)

여기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장 떼고 붙자고. 직장 떼고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승부하고 싶다고. 그래서 디자이너라는 개인적 객체와 회사라는 집단적 객체의 계약 관계를 통해서 정정당당하게 악수를 하자고 말이다. 그 집단이 나를 필요로 하니, 나는 거기서 일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필요로 하는 만큼 유용하게 일을 할 자신이 있으니 그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느 특정 회사 소속의 디자이너가 아닌, 개인적 객체로서의 디자이너로 서고 싶었던거다. 


그래서, 직장은 나에게 이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배움의 터’ 와 ‘나의 가치를 제공하고 댓가를 지불 받는곳’ 이다. 


그래서, 너는 그런 직장에 다니고 있니?

그래서, 직장을 떼고 개인적 객체로 서 있을 생각 하니 좀 무서워졌다. 수많은 훌륭한 디자이너가 있는 이 세상속의 풍파를 이겨낼 자신이 있는가. 그 경쟁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위 두가지 정의에 따르면 사실 나는 프리랜싱을 해야 맞는거다. 직장을 떼고 디자이너를 하려면 프리랜싱을 해야지. 그런데 나는 사실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 그게 in-house designer의 의견에 더욱 무게가 실리는 구조적 모순 때문일수도 있고, 내 특정한 프로덕트 필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조직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안정감 때문일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현재 마이크로소프트를 다니는 상황 안에서 이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 하루 많이 배우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여기서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는가?


만약 두개의 모든 질문의 답이 NO라면, 기꺼이 떠날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이직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가 아니고, 이건 내가 정의하는 직장의 의미에 유배되는 것이였다. 3년 정도가 되어가니 더 이상 배울것도, 유용하게 쓰여지지도 않으니 여기서는 이젠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 직장 안에서 적극적으로 오지랖을 부리면서 여기 저기 기회를 엿본다면 내가 발견하지 못한 배울것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건 객관적 사실 보다는 주관적 느낌에 의존하려 하였다. 머리로 이성적 분석을 통해 느끼기 보다는 몸의 감각을 세워 판단을 맡기고자 하였다. 또한, ‘리셋’버튼을 누름으로써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배울것들을 찾고,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해서 더 유용하게 쓰여짐을 바랬다. 마치 수학의 정석 기본편의 마지막장을 덮고 수학의 정석 응용편을 새롭게 펼치는 것 처럼. 


다음 스텝

"Hi Gilbert, I have wonderful news!”

9월부터 디즈니와의 전화 인터뷰, 온사이트 인터뷰는 진행하고 있었고, 10월 초, 한국에 있을때 디즈니의 인사담당자에게 이런 문구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 많은 고민들이 중첩되서 어지럽게 머리속에 쌓여있던 시기에 리셋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미래의 불투명함에 대한 조각들이 파도에 휩쓸려 없어지는 느낌이였다.


왜 디즈니?

내가 가는 팀은 Disney Parks and resorts 라는 팀으로 크게 Disney land, Disney cruise line, Disney resort 세개로 나뉜다. 디자인 팀은 주로 어떻게 Physical experience와 Digital experience가 적절히 조합이 될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더불어 Magic band라는 디즈니랜드에서 쓸 수 있는 Wearable device도 함께 디자인 한다. 자, 그렇다면 디즈니는 위에서 말한 ‘배움의 터’ 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곳’ 이 될 수 있는가?  


디즈니 Parks & Resorts 팀의 Business line


배울것이 많은가? 

위에서 말한것 처럼 디즈니에서 할 업무들은 기존에 해 오던 Productivity field에서 벗어난 나에게는 새로운 Field이다. 기존과는 다른 유저들의 니즈와 골을 이해해야 하며, 더군다나 더욱 좋아하는 부분은 digital experience가 Physical experience를 더욱 좋게 하기 위함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기술의 발전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디즈니 랜드와 디즈니 크루즈 라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현장에 더욱 집중하고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Digital technology가 귀찮은것들을 없애준다. 매직밴드를 통해서 티켓팅과 음식 주문과 호텔 방문을 열 수 있고, 모바일 앱을 통해서 놀이기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효율적인 동선을 짤 수 있게 도와준다.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사람들이 원하기도 전에 ‘너, 이거 원했잖아’ 라고 강요하는게 아니다. 기존의 테크 컴페니와의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 부분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또한, 예전부터 그들은 스토리 텔링이 강조되어 있는 회사이고(그들이 만들어 내는 컨텐츠를 봐라), 그 문화는 뿌리깊게 업무 컬쳐에 자리잡고 있다. 디자인을 진행하면서 “여기에 빨간색이 들어가고요, 여기 동그란게 들어갈꺼예요” 라고 말로 하는 방식이 아닌, 프로토타입을 통해서 말을 하기 보다는 보여주는 방식이 먹히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 부분에서 나는 배울게 많다고 생각 되었다. 더 이상 정적인 UI가 아닌 동적인 UI를 만들어야 하는 지금 이 시기에 스토리 텔링 스킬과 보여줘야 하는 프로토타입 스킬은 앞으로의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될꺼라 판단했다.   


유용하게 쓰여질 것인가? 

이 질문은 간단하다. 아직 모른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이 질문이 YES일지 NO일지는 나오게 될 것이다. 능력을 인정받고 열심히 하다보면 유용하게 쓰여질 것이고, 여기 저기 피하고 다니면서 어떻게 쉴 궁리만 하다보면 유용하게 쓰여지지 못할 것이다. 간단하다. 유용하게 쓰여지고 싶다면 열심히 하고 인정 받아라. 



지난 3년 동안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많은것을 배웠고, 유능한 디자이너들과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이 배웠고, 많이 성장했다. 앞에서 말한것과 같이 이제 수학의 정석 기본편의 마지막장을 덮고 응용편을 펼칠 차례이다. 많은 고민을 했고, 리스크와 익숙함에서 벗어나 불편함을 가져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많이 던졌고, 위 두 가지 질문에 따라 나는 이제 리셋 버튼을 누를때가 되었다. 좋은 선택인가, 잘못된 선택인가. 이 글을 누군가가 나에게 전했던 말로 마무리 한다.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은 없어. 다만 너가 잘하면 좋은 선택이 될 것이고, 너가 못하면 나쁜 선택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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