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너는 내가 첫사랑이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밀려온 건 당혹감이었다.
내가 정말 누군가의 첫사랑이 될만한 사람이던가?
내 기억 속의 나는 서툴고, 사소한 일에 전전긍긍하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일 뿐인데.
아니, 나는 네가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별로인 사람일지도.
내가 아는 ‘첫사랑’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했다. 비 내리는 정거장에서 사연 있는 눈빛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기억 저편에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박제된 그런 존재들 말이다.
하지만 네가 말한 '첫사랑' 세 글자에는 그런 거창한
미사여구 대신, 투명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온몸이 간지러울 만큼 부끄러워졌다.
동시에 나라는 평범한 사람의 한 시절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순수했던 사랑의 ‘원형’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한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네가 말해준 그 '첫사랑'이라는 이름이 내 삶을 지탱하는 우습고도 비장한 원동력이 되어버렸다.
네가 기억하는 그 시절 주인공이
초라하게 망가지지 않도록,
오늘의 내가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게 만드는 힘.
네 마음속에 박제된 그 눈부신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분명 누군가의 첫사랑이다.
연인이 아닐지라도,
당신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눈을 맞춘 부모님에게
당신은 생애 가장 강렬하고도 벅찬 첫사랑이었다.
혹은 당신의 서툰 진심을 몰래 훔쳐보며 밤잠을 설치던이름 모를 누군가에게도 당신은 이미 숨 막히게 아름다운 영화 속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금 더 귀하게 여겨야 할 의무가 있다.
나를 첫사랑이라 여기며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그 수많은 마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 당혹스러운 세 글자를 들은 이후
나는 나를 지탱하는 이 우스운 원동력으로,
당신의, 그리고 나의 가장 찬란한 주인공으로 남기로 했다.
첫사랑이 된다는 건,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근사하게 봐준
누군가의 마음을 선물 받는 일일지도 모른다.
네가 사랑했던 그 시절의 나를 위해,
오늘을 조금 더 성실히 살아나간다.
단잠을 이겨내고 기어이 러닝화를 신는다거나,
대충 때우던 끼니에 싱그러운 채소를 곁들여
나를 대접하는 일.
최신 유행이 들끓는 유튜브 화면을 끄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책장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일.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기에 충분했던,
그때의 나를 지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