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왜 수술대에 올라야 했나
Author's Note: 성탄 전야, 모두가 안도할 때 기록해야만 했던 글입니다. 환율 1,485원이라는 임계점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단순한 ‘시장 안정’이 아니라,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미래를 가불한 정부당국의 필사적인 사투였습니다. 이 에세이가 대한민국 실물 경제를 향한 냉철한 경고음이 되길 바랍니다.
도심이 캐럴과 조명으로 물들 때, USD/KRW 환율은 1,485원이라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위태롭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장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적이 일어났다. 환율은 단 몇 시간 만에 40원 가까이 폭락하며 1,440원대에 안착했다. 당국은 이를 ‘시장 안정화를 위한 단호한 행동’이라 자평했다. 하지만 이 기적 같은 급락은 체력의 회복이 아닌, 국가가 투입한 거대한 진통제의 결과물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번 개입을 ‘시장 수호’라 칭송하지만, 그 이면의 진실은 서늘하다. 이번 전쟁의 실체는 대한민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구하는 싸움이 아니라, 12월 30일이라는 ‘회계적 마감’을 사수하기 위한 거대한 윈도우 드레싱(Window Dressing)에 가깝다. 정부는 장부상의 국가 부채 비율을 관리하고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국민연금(NPS)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환율 소방수’로 차출했다. 이는 단기적 패닉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기보다, 구조적 모순을 덮기 위해 미래의 자산을 가불한 위험한 선택이다.
논리는 냉혹하며 데이터는 그 민낯을 드러낸다. 연말 종가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하는 순간, 국내 은행들의 위험가중자산(RWA: Risk Weighted Asset)은 기계적으로 폭증한다. 이는 곧 BIS(자기자본비율)의 급락을 유도하며, 은행은 건전성 유지를 위해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의 대출금을 회수해야 하는 ‘둠 루프(Doom Loop)’에 진입하게 된다. 당국이 국민연금과 외환 스왑 라인을 연장하며 개입한 본질적 이유는 민생 구원이 아니라, 이 수치적 붕괴가 불러올 거대한 금융 패닉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 기제’였다.
하지만 방어의 수단이 경제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미국의 통화량(M2) 증가율이 포스트 팬데믹 이후 안정 궤도에 진입할 때, 한국은 적자 국채 발행과 확장 재정으로 원화를 쏟아부었다. 시중에 넘쳐나는 원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사수하겠다는 전략은 형용모순이다. 42개월째 지속되는 한미 금리 역전이라는 ‘만성 질환’을 방치한 채, 국민연금의 환헤지라는 단기 진통제만 과다 복용시킨 셈이다.
이 방패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국민연금의 환헤지는 한-미 금리차만큼의 실질적 이자 손실을 현금으로 지불하는 행위다. 위험 관리라는 수식어 뒤에는 연간 수조 원에 달할 수 있는 노후 자산의 잠식이 숨어 있다. 미국 재무부가 한국을 ‘환율 관찰국’으로 주시하며 외환 시장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인위적 개입은 국제적 신뢰 자본마저 갉아먹을 위험이 크다.
물론 개입하지 않았을 때의 패닉 비용이 더 컸을 것이라는 당국의 항변은 일견 타당하다. 1,500원이 무너졌을 때 벌어질 외화 유동성 위기와 기업 부도 리스크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에게 진통제만 투여한다고 병이 낫지는 않는다. 1월 초, 연말 결산이 끝나고 수출 대금이 유입되면 환율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2월, 정부의 개입력이 소진되고 시장의 역습이 시작될 때 우리는 진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제 ‘수치 관리’ 정치를 멈추고 금리 정상화와 재정 건전성 회복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시작해야 한다. 숫자를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무너진 펀더멘털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성탄 전야의 기습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장부상의 안녕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미래를 지불할 준비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