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평화헌법의 종언과 보조금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
아베 신조가 남긴 흔적은 생각보다 깊습니다. 십 년 넘게 일본 경제를 지탱해온 ‘아베노믹스’는 쉽게 말해 엔화를 찍어내 돈을 풀고,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자극해 불씨를 살려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2026년의 일본은 이 익숙한 처방전에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사람들의 지갑을 들여다보는 대신, 공장의 엔진을 아예 새로 바꾸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걸 단순히 아베노믹스의 연장선으로만 보기엔 그 속내가 꽤 달라 보입니다. 아베가 ‘수요’를 만들어 어떻게든 불을 지피려 했다면, 다카이치는 국가가 직접 산업의 체력을 키우는 ‘공급 측면’의 강화에 더 힘을 싣고 있습니다. 반도체나 로봇, 원자력 같은 분야에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는 것도 단순히 기업을 돕겠다는 차원을 넘어 보입니다. 어떤 위기가 와도 일본 안에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을 갖추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경제 정책이라기보다,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설계도에 가까워 보입니다.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는 예산을 짜는 방식입니다. 해마다 예산을 승인받던 관행에서 벗어나, 기업들이 장기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게 국가가 수년치 자금을 미리 보장해주는 식입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보다는 ‘국가의 확실한 지갑’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시대로 돌아가는 모양새입니다. 이제 일본에게 경제는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날카로운 생존 무기가 된 셈입니다.
전 세계 경제의 흐름도 이미 효율성보다는 안보를, 싼 가격보다는 안정적인 공급을 우선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런 변화의 최전선에서 자신들만의 운영체제를 새로 짜는 중입니다. ‘보조금은 시장을 왜곡한다’는 해묵은 경고보다는 ‘보조금 없이는 안보도 없다’는 말이 더 설득력을 얻는 현실입니다. 이런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가 여전히 예전 교과서의 문법만 고집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