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열한 시. 맥주를 한 캔 따놓고 아내와 함께 보는 일반인이 출연하는 연애 프로그램에는, 그들만의 사랑을 속삭이는 낯뜨거운 말들이 흐른다. 이 둘이 만난지 이제 일주일이 채 안됐을텐데…?
“사랑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을 하는거보면, 나는 아직도 사랑을 잘 모르는 듯싶다. 아니, 확실히 잘 모른다. 나이가 어느새 삼십대 중반에 들어서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삼십대 밖에 안되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십이 되고 칠십이 되면 그 때는 알까? 아무래도 자신은 없다.
혹시 사람들도 그래서 “사랑한다.”보다는 “사랑하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걸까? 생각해보면 사랑의 대상에 따라 조금 그 어투가 다른거 같기도 한데, 주위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하는 우리 딸”, “아들, 사랑한다.” 등의 말을 하는 건 꽤 자주 들어본 반면, 연인이 연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잘 못 들어본 것 같다.(TV 드라마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하는게 아니다. 실제로 화자가 이야기를 하는 걸 내 귀로 듣는걸 말하는거다.) 그 빈도를 화자의 “확신에 찬 정도”로 치환해 얘기해보자면, 전자는 아주 확실하게 “사랑한다!!!!(내 딸, 아들아!!)” 라고 하는 것 같은데, 연인에겐 “사랑하긴 하는데… 뭐 너가 나한테 섭섭하게 잘 안해주면 나도 좀 변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느낌이랄까. 어쩌면 이 빈도의 차이는 관계의 은밀함의 정도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연인은 보다 은밀할 수 밖에 없어, 타인의 안테나들이 사방에 세워진 공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게 더 어색하긴 하니까. 더욱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해도 대한민국 아닌가.
아내를 만난지 어느덧 8년이고, 함께 가정을 꾸린지 3년인데, 사랑한다는 말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내가 말하는 수도, 내가 듣는 수도 많이 줄었다. 아니, 근 2-3년간 들어본 적은 있을까. 결혼한 이후에는 못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결혼 전에 각자의 집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던 전화의 말미는 항상 사랑한다는 말로 끝났던 것 같은데. 딱히 그 말이 듣고 싶다거나 그런 것도 또 아닌데, 왜 이렇게 변했나 생각해보면 딱히 또 뾰족한 이유도 없다. 이전보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건가? 아니, 그건 또 아닌거 같다. 나 홀로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아직 어린아이처럼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내를 보면 아직도 너무 사랑스럽다. 그래서 아내에게 출근인사를 하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게 그냥 자연스러운 나의 행동일 뿐,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며 억지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근데 왜 정작 말은 줄었을까?
이소라는 본인 노래에서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라고 했고, 영화 <봄날은 간다>의 극중 캐릭터 상우(유지태)는 이제 더 이상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은수(이영애)에게 아주 허탈하고도 담담한 목소리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을 했다. 이 보다 더 많은 유명인들이, 아니,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각자의 책과 노래와 영화와 그림 속에서 자신들만의 사랑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말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소라의 사랑은, 내 마음이 사랑일지 아닐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다만 당신 마음대로 “사랑이 아니다.”라고 단정짓지는 말아달라는 말에서 이미 그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고, 상우의 어색한 쓴 웃음과 그 다음의 대사 “헤어지자.”에서 그 만의 사랑이 또 느껴지는건 결코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각자가 각자의 세상 속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정의하고, 표현하고, 가슴앓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아내에게 돌아가 좀 더 나의 사랑을 생각해보자면, 과연 아내에 대한 내 사랑은 전보다 작지 않다. 말의 횟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나의 사랑은 결코 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누군가가 말하길,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결코 알지 못한다했다. 또, 사랑한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은 결코 인생에서 아끼지 말라고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사랑의 정의가 무엇이 중요한가? 뭣이 중헌디? 사랑을 말한다고 아내의 귀가, 나의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닌데. 말하지 않아도 아는 <초코파이>같은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까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아내에게 사랑을 한번 속삭여 줘야겠다. 갑자기 그러면 민망하니까 좀 장난기도 섞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의 세상 속에 있는 사랑의 정의도 자연스럽게 변해가고 변해가야하는 것 아닐까. <봄날은 간다>의 상우도 마지막엔 결국, 사랑이 변한다는 걸, 변할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