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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넷_봄, 그리고 햇살

by 길땡땡

처음 소식을 들었던 곳은 5월의 프랑크푸르트였다. 현지에서 만난 동료 직원은, 왜 독일에 철학자가 많은지 알고 있냐며, 독일 하늘은 보통 구름도 많고 일조량도 적고 우중충한데, 마침 딱 지금 시즌의 날씨만큼은 정말 좋다고 했다. 그 직원의 말마따나 하늘은 넓고도 파랬고, 빛나는 오후의 햇살은 나의 살짝 찡그린 눈 두덩이 위에 가득했으며, 군데군데 떠다니는 큰 구름 덩어리들은 마치 먼 바다에 떠다니는 함선 같았다. 마침 주말이었던터라 오전까지 밀려있던 출장 업무를 마치고 오후시간엔 짬을 내서 직장선배와 뢰머 광장(Römer Platz)을 구경하고는, 대낮부터 생에 처음 맛보는 파울라너의 생 밀맥주 한 잔을 야외 테이블 위에 놓고 앉았다.

“나 말할거 있어. 아주 놀랄만한 일이 생겼어. 돌아오면 말해줄게”

휴대폰 너머 아내는 감정을 감추고자 했으나 이미 어린아이마냥 들떠 보였고, 나는 그 순간 이미 답을 알 것 같았다.

“뭐야? 됐어? 됐대?”

짧은 통화를 마치고, 남아있던 생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약간 식어버린 맥주는 분명 조금 쌉싸름한 쓴 맛 이었을 텐데, 나에겐 그 날 오후의 햇살 가득한 맛으로 남았다.


아내와 결혼 3년차에 접어들면서, 함께 생각하고 있는 것 하나가 있었다. 신혼생활은 어느정도 즐겼고, 아이를 갖고자 한다면 이제 슬슬 가지려고 노력해야 되는 나이었다. 아내와 처음 연애를 할 때부터, 둘다 딩크족으로 살 생각은 딱히 없었다. 다만, 반대로 말하자면 딱히 곧 바로 가족구성원을 한 명 더 늘려야 된다는 생각도 또한 없었다. 첫 일년은 둘이서 지지고 볶고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안정기에 들어선 3년차에는 둘이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리라. 둘은 아주 편했고, 둘은 때때로 즐거웠고, 둘은 대부분 만족했다. 둘이서 걷는 가을날 휴일의 산책들에 동반할 누군가가 꼭 더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물학적 나이라는 것은, 우리 둘의 편함과 즐거움과 만족을 천년만년 누릴 수 있게끔 기다려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느샌가 어떤 겨울날부터, 아내와 같이 사용하는 거실 TV의 유투브 계정에서는 노산과 불임에 대한 영상이 추천되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의 나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우리 나이대의 사람들이 관심가질만한 사항을 정확히 알고 있는, 아주 용한 점쟁이 같기도 하고 전문 카운셀러 같기도 한, 아주 귀신같은 놈이었다.

“35세가 넘으면 생물학적 노산이래.”

“우리 벌써 넘었는데.”

“아냐. 대통령이 한 살 깎아줬잖아.”

“그럼 딱 맞는 나이인가.”

“낳을거면 올해는 준비해야되지 않을까.”

“그러게.”

그렇게 짧은 대화 뒤에 우리는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계획에 따른 추진력 하나는 잘맞는 우리 둘의 성격 덕분이리라. 조금 찾아보니 하도 출산율이 낮다고 난리라 그런지, 나라에서는 임신 관련해서 부부들에게 지원해주는 것들이 꽤 있었다(준비하는 사람이 꽤 많은건지, 생각보다 예약이 은근히 어렵다.). 3월 겨울 동장군이 잠시 약해진, 날 좋던 평일에 연차를 썼다. 경복궁 근처에 위치한 보건소에서 무료로 검사를 받고, 쇼핑백에 챙겨주던 엽산제와 이런저런 물건들을 받아들고, 어느새 따뜻해진 날씨에 둘이서 서촌을 걸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맛집이라 알려진 식당에서 정갈하게 한상 차려진 막국수도 각자 비빔과 들기름으로 나눠 목구멍으로 후루룩 넘겨버리고, 왠지 가뿐해진 발걸음으로 집까지 둘이 또 걸었다. 길거리는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과 경적소리로 가득찼지만, 일렬로 늘어선 나무들엔 어느새 푸릇한 생기가 도는 듯 했고, 한낮 바람은 여름날 파도처럼 규칙적으로 시원하게 얼굴에 맞닿았다. 그 날 걷던 길의 오후의 햇살은, 참 눈부시고도 따뜻했다. 봄이었다.


비워버린 맥주 잔을 뒤로하고 프랑크푸르트 거리의 햇살을 맞으면서 나는, 아마 서촌에서 집까지 걸어오던 그날 이미 콩떡이를 만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혹시나 누군가 궁금해할까 봐, 심장소리가 “콩떡콩떡” 뛰어서 그 날부터 “콩떡이”가 됐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그 시점이 2개월 차이라 당연히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내가 지금껏 당했듯 그땐 그 사람한테 물어봐줘야겠다.

“너 T야?“(참고로 난 극 T다.)

내 ‘아빠로서의 촉’이 그렇다는데 뭐. 우리 콩떡이는 분명히 그 날 봄의 옷을 걸치고 나에게 슬며시 왔으리라. 그래서 내 마음이 이렇게나 터질듯이 벅차고, 생각만으로도 가끔 울컥이게 되는걸. 콩떡이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2개월 남짓 남아있는 오늘, 나는 글을 쓰며 또 혼자만의 상상을 해본다. 오늘 겨울치고 날이 따뜻하던데, 이거 콩떡이가 두 달 뒤에 보자고 나한테 보내는 시그널인가?


뭐든 좋아. 콩떡아. 아빠는 너에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보여주고 싶은 것도, 먹여주고 싶은 것도, 경험해보게 해주고 싶은 것도, 말해주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 그러니까 아빠랑 만나면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해보자. 가끔은 너무 꼰대 같이 굴더라도 용서해줘. 혹시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로 자기 변명을 너무 자주하더라도 용서해줘. 다만, 봄바람처럼 갑작스레 따스히 다가온 너 덕분에, 눈 밟은 강아지처럼 너무 기분이 들떠버려 철 없는것 처럼 보일 뿐일거야. 그러니까 아빠 곁에만 있어주렴. 그러면 아빠는 그 어떤 겨울날에도 살아가기 참 따뜻할것 같아.


이제 곧 보게될 너를 또 그리워하며,

이미 벌써 사랑한다. 우리 딸. 나의 봄. 나의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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