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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일곱_잘 좀 하자

by 길땡땡

창사 이래 최대 위기.


작년 말 즈음부터 (내가 다니고 있는) 우리 회사에 떠도는 말이다.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매일 전층에 있는 안내방송 스피커에서 틀어주는 것만 같고, 오전 7시 40분경 회사 입구를 들어가는 순간부터 집에 돌아가기까지 그 위기감은 고스란히 공기중에 녹아있다. 작년말 인사 시즌에 대표이사가 급작스럽게 외부인원으로 교체되었고, 여러 임원들은 급작스레 짐을 싸고 작별을 고했다. 내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때만 해도 잘나가는 대기업 계열사로 꼽히던, 신입사원을 몇 백명씩 뽑으며 대기업그룹의 알짜배기 회사로 업계의 정평이 나있던 우리회사는,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말 그대로 “오늘 내일” 하고 있다.


사실 그전부터 징후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를 수는 있겠지만, 처음 입사했던 순간부터 우리 회사가 돌아가는 체계는 부족했다. 사회 생활이라고는 결혼식장 아르바이트와 대기업 인턴정도밖에 해보지 않았던 내게, “이게 회사인가?”하는 의문이 절로 들었더랬다. 내가 사장이라면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지는 못할 듯 싶었다. 더 이상한 점은 아무도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안그래도 돌다리도 꼭 한번 두들겨보는 비판적인 눈을 가진 나의 가치관과, 꼭 그걸 입으로 꺼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난 성격 탓에, 문제로 보이는 점들에 대한 의견을 상급자에게 피력하면 “너는 왜 그렇게 부정적이니? 아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혹은 “너는 왜 너만 잘났다고 생각하니? 그걸 사람들이 몰라서 가만히 있는거 같니?” 혹은 “너는 뭐가 중요한지 몰라. 그게 뭐가 중요하니?” 등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그래. 이 사람들이 나보다 더 똑똑하겠지. 그러니까 가만히 있겠지. 이런 작은 문제들은 진짜 문제가 아니겠지. 나는 단편만 보고 잘못된 생각만 가지고있는 거겠지. 나보다 위에 계신 분들은 더 큰 뜻이 있는거겠지. 내가 너무 다 잘못됐다고 하고 다 바꾸려고만 하는 것일 수도 있어. 아직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잖아? 신입으로 입사하기 3년전쯤 유행했던 드라마 미생에서, 내 의심들을 간단히 부정해줄 명대사를 억지로라도 떠올렸다.


“전부인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벗어나보면, 아주 작은 부분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결론적으로 결국 저 말은 물론이고, 나의 추측성 소망들은 대부분 글러먹은 소망들이었음이 판명됐다. 전부는 결국 일부가 모여 구성될 뿐이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나의 회사생활 중에, 진짜 거시적인 관점에서 일과 업무를 바라봤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돌아보면 볼수록 대부분의 상사들은 그저 회사의 정치판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하루살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아서 바꾸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귀찮아서 바꾸지 않았고, 똑똑해서 문제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눈치가 보여서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도 책임지고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거다. 그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눈감게 되는 그 행태들이, 나를 포함하여 결국 습관이 되고 조직의 분위기자 문화가 되어 큰 문제들에 대해서도 눈감게 됐을 뿐이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과가 이미 너무 명백해서 부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니가 뭘아냐고 지껄이던 그 상급자들은 결국 다 어디론가 좌천되거나 회사를 떠났다.) 그렇다.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저질러 버린 일이다.


새로 외부에서 투입된 대표이사는, 부임하자마자 모든 걸 바꿀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 회사는 존재 이유부터 찾아야한다며 회사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는, 모든 부서에 새로운 업무에 대한 계획을 지시했다. 회사 중역들은 대표이사 보고를 들어갔다가 혼이 빠진 채 나와서 전면 재수정을 몇차례나 하고 있고, 덕분에 모든 부서의 기획팀은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비상이 걸려있어 직원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지만, 분명히 공감하고 있는 것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확실히 우리는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표이사는 우리 회사가 몸담고 있는 업계에 대한 경험이 없다. 아무래도 전혀 다른 업종에 종사하다가 갑자기 대표이사로 내정되다 보니, 당분간의 혼란은 계속될거라고 예상된다. 타 업종에서 성공적이었던 대표이사로서 지금의 직원들에게 비전을 먼저 제시해 준다면 좋겠지만, 대표이사 본인도 뭘 해야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무엇이든 우리회사가 이번 기회로 완벽히 바뀌어서 업계에서 꼭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루 중 일부 시간동안 잠시 머무는 공간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래도 내가 사회에 처음 나왔을 때 아무것도 없던 날 알아준, 회사 여기저기에 동료들과의 추억들도 묻어있는, 애증하지만서도 또 애증하기에 항상 또 어느샌가 생각나버리는 고향 집구석 같은 존재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가족이 집에 들어오는 이 시점에서, 기저귀와 분유값은 안정적으로 벌 곳이 있어야할 것 아닌가. 잘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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