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엔 화려한 파랗고 붉은 장식품들이 걸렸다가 어느샌가 내려오고, 대형쇼핑몰이나 카페에 들어가면 언젠가 한 두 번은 들어봤을 듯한 재즈 풍의 캐롤들이 흘러나왔다가 덤덤히 사라진다. 아파트 입구의 나무들에는 올 겨울 춥지 말라는 인사를 전하는 것처럼 전구를 칭칭 감아뒀고, 어둑어둑한 초저녁부터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화려히 반짝거린다. 길에서 만나는 이름모를 사람들의 코와 두 뺨은 점점 붉어지고, 쌔근쌔근 숨쉬는 그 따듯한 숨들이 작디작은 물방울들로 내 눈에 비쳐온다. 그 분위기가 참 가족적이고 친근해서 마음이 설레는데, 또 한편으론 두 눈덩이를 짓누르는 바람에 조금은 쓸쓸해지기도 한다. 12월과 1월. 일년의 마지막과 처음은, 아직 이뤄지지 못한 계획과 미처 세워지지 못한 계획들에 대한 온갖 형태의 가지각색 감정들이 한데 어울려 소용돌이치는, 굳이 비유하자면 가족구성원들의 일주일 치 허물이 쌓여버린 감정의 빨래통 같은 달이다.
‘올 한해 넌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그리고 올 한해 넌 무엇을 할 것인가.”
연말연시는 자연스럽게 내게 이런 물음을 던진다. 평소에는 곧 죽어도 “극T”라 주장하면서, 정작 이 시기의 나는 굉장히 감성적이게 되는 건 왜일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까지 난 모순 덩어리고 모순덩어리다.
어렸을 때는 마냥 신나기만 했지만, 성인이 된 언젠가부터 항상 한 해를 마중하고 맞이할 때마다 쓸쓸해지는 감정, 거기엔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이 자주 묻어있다. 작년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는데, 과연 난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한동안 손을 놓았던 독서도 다시 시작했고, 단순히 일기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순간순간 살아가면 느끼는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보다 자주 글도 쓰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가족을 맞아 들이기 위한 마음가짐과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들도 마쳤는데. 나는 과연 한 해를 마무리하고 그 다음의 한 해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을까.
2024년은 유난히 일이 많고 바빴던 해였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특히나 최근엔 사회적으로 너무나 안타까운 일들만 연속해서 벌어졌고, 아직도 우리는 그 후유증 속에 있다. 하지만 더 별로인 것은 바빴던 한 해가 곧 꽉 찬 한 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바빴던 만큼, 경험은 많았으나 시간이 많지 않았고, 시간이 많지 않으니 자연스레 생각이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는 개인적으로 경험의 당시 순간보다 나중에 혼자 생각해보면서 뒤늦게 느끼는 점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이 적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에게 풍족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일 테다. 혼자만의 여유 시간이 정확하게 주어졌던, 이를테면 군대에서, 유학생활에서, 홀로 근무하던 해외 생활에서, 나는 아마 스스로에겐 가장 풍족한 시간을 보냈었던 듯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24년도가 많이 후회되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혼자여서 좋은 점이 있었던 만큼 함께여서 좋은 점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하나하나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했다. 다만 그 경험들을 정리하고 다시 나의 삶으로써 남기는 부분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또한 지금 이 순간이 연말이자 연시이기에, 5월이나 8월 쯤이면 하지도 않았을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스스로를 조금 톺아보며 아쉬워하는 것일 테다. 오늘 불어오는 겨울 바람에 아쉬움을 흘려보내고, 내일 또 불어오는 겨울 바람에 또 그 아쉽던 마음을 좀 더 가벼이 아쉬워해보겠지.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아직은 준비되지 않았는데 떠나 보내야만 했던 옛 연인들과 그랬던 것 처럼. 그래도 결국은 그와의 이별에만큼은 익숙해졌던 것처럼.
눈 깜짝할 새에 지나버린 한 해를 마무리하라기엔 아쉬운데,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을 준비를 해야하는 그 달, 우리는 지금 그 계절에 있다. 사람은 익숙함의 동물이자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여지껏 익숙해지지는 않고 연중에는 망각해버리는 이 감정들을 뒤로하며, 작은 목소리로나마 이뤄지지 못할 허망한 소망을 또 바래본다. 매년 또 바라고 바라는 일이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내년에는 내년과 조금 더 나은 이별을 할 수 있기를. 또 그 다음 해를 더 기쁜 마음으로 맞기를. 조금 더 준비된 이별과 만남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이 계절을 좀 더 즐길 수 있기를.
살갗을 아리는 현관문 밖의 팍팍한 삶과는 별개로, 지금 이 시기만이라도 마음 한구석엔 석유난로의 샛노란 온기가 작게나마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