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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고인돌에서 갑곶돈대까지, 시간 위를 걷다

대전대학교, [세계문화유산 고인돌을 찾아서]

by 길고영

2025년 5월 17일


대전대학교 박물관에서 대전대 학생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화도로 향하는 특별한 답사를 열었다. 오전 7시 30분, 대전에서 강화도까지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 여정의 첫 감상은 이것이었다.

고인돌은 초등학교 사회과부도에나 나오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거대한 돌을 진짜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강화역사박물관의 해설사 선생님의 말을 듣는다. 강화도는 개경과 한양에 인접한 지리적 이유로, 한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등장하는 공간이다. 고려 시대 강화로의 천도 이후,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이곳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간척 사업이 시작된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나무 구조물을 만들고, 민물을 넣어 짠기를 빼고, 흙과 돌로 메워 땅을 만드는 일.


고려 시대 사람들이 바닷물의 짠기를 뺀다니, 대체 어떤 근성인가 싶었다.

농사짓자고 바다랑 싸우다니, 존경스럽다 못해 약간 무섭기도 했다.

그 험난한 개척 끝에 강화도는 오늘날, 제주도·거제도·진도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강화역사박물관을 탐방한 뒤, [고려산 호랑이] 식당에서 먹은 갈비 코다리찜은 고단한 여정을 보상해 줬다.

박물관에선 ‘역사 공부’라는 무게감이 있었지만, 갈비 코다리찜 앞에서는 역사고 뭐고 다 잊을 뻔했다.





사회과부도를 기억하고 있다면, 강화도의 고인돌을 책 표지에서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53톤짜리 덮개돌을 올린 북방식 지석묘 앞에 섰을 때, 나는 눈을 의심했다. 고인돌을 세우기 위해 2,000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어떻게 이 돌을 세웠을까’보다, ‘왜 이 돌을 여기까지 옮겼을까’를 묻게 된다.




갑곶돈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마주한 강화의 또 다른 정체성은 ‘저항’이었다. 병인양요(1866)로부터 159년이 지난 지금, 이곳엔 당시를 증언하는 유물과 흔적이 남아 있었다.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탱자나무의 가시마저 무기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갑곶리 탱자나무 앞에서 더욱 실감 났다.



천해의 요새 뻘밭을 보며 웃음이 나다가도, 재현된 갑곶돈대(성곽)과 작은 무기를 보며 마음이 아찔했다.

당시 건장한 체격의 서양 병사와 조선 병사가 마주했다면, 과연 한 발이라도 쏠 수 있었을까.


외세의 신식 무기에 맞서, 우리는 조총 하나에 총알과 화약을 따로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야 했다. 비가 오면 쓸 수 없었고, 장전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에 비해 그들은 금속 탄피에 모든 걸 결합해 몇 초 안에 연속 사격이 가능했다.


이 무기의 차이를 보며 나는 안쓰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기록 앞에서, 나의 감정은 안쓰러움보다 깊은 자긍심으로 바뀌어 갔다.



오늘의 여정은 저녁 7시 30분, 대전 도착과 함께 끝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아직 강화도에 머물러 있었다.

강화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내기 위해 싸웠던 공간이었다.

고인돌에서 갑곶돈대까지 이어진 하루는 ‘무거운 돌을 어떻게 세웠을까’보다, ‘무거운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를 묻게 만들었다.


실제로, 우리는 지지 않았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는 3,912kg에 달하는 ‘강화동종’을 약탈해 가려했지만,
결국 해변에 버리고 떠났다.


2004년, 대한민국이 프랑스와 고속철도 협상을 진행하던 중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에서 약탈된 도서
[시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의 반환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그 책은 140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도, 역사는 기억하고, 돌려받고, 복원된다.


박물관의 의미 또한 다시 생각하게 됐다.

개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유물을 발굴·보존하고, 그 가치를 설명해 주는 공간.

대학이 연구의 중심이라면, 박물관은 그 결과를 세상과 공유하는 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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