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하지 못하겠다면, 떠나도 되나요?
처음 법륜스님을 알게 된 건 친정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아버지는 퇴직 후 정토대학에 다니시며,
스님의 말씀을 꼭 들어보라고 권하셨다.
며칠이고, 법륜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때론 자장가 삼아 듣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님의 말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 순간 듣기를 멈췄다.
공통점을 알아챘다는 사실에 잠깐은 기뻤지만,
그러나 곧, 말맛이 씹히는 듯한 씁쓸함이 입안에 남았다.
법륜스님은 고등학교 시절 불교에 흥미를 느끼셨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셨다고 했다.
지금은 동남아 등지에 학교를 세우시며,
그곳 사람들의 삶에 부처님의 온화함이 스며들도록 힘쓰고 계신다.
스님으로서의 삶에는 해외 봉사와 같은 굵직한 일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중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는 데 쓰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몇십 년의 내공을, ‘즉문즉설’ 같은
통로를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나눠주고 계신다.
상담자이자 행려처럼.
내가 찾아낸 공통점은 ‘문제와 나를 분리하는 태도’였다.
문제를 나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으면,
그 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맞지 않는 부부라면 이혼하면 되고,
힘든 회사라면 그만두면 된다.
문제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그것이 스님의 말속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했다면, 이제는 ‘포용’하라는 것이다.
남자친구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알면서도
결혼을 선택했다면,
계속해서 포용하거나,
포용하지 못하겠다면 이혼하라는 것.
결국 선택 이후의 삶을 책임지는 것.
그것이 법륜스님의 요지인 것 같았다.
또 하나, 스님이 반복해 강조하시는 태도는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 위에 더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는
그 욕망의 크기와 성격을 점검해보라는 것이다.
“남편이 성실히 생활비를 가져다주고, 도박도 하지 않고, 딴 짓도 안 하는데,
주말에 나랑 나들이 한 번 안 간다고 그게 정말 문제인가요?”
그럴 땐 늘 이렇게 덧붙이신다.
“더 바라는 건 당신의 욕심입니다. 그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이 말을 듣고 나면, 내가 ‘문제’라고 여겨온 장면들이 다시 보인다.
내가 원하는 건 진짜 관계의 더 깊은 연결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정한 기준대로 사람이 움직여주길 바랐던 것인지.
그 경계는 늘 흐릿하고, 욕심은 자주 서운함으로 변한다.
결국, 스님이 건네는 말은 이렇다.
문제를 고치기 전에, 내가 진짜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인지 먼저 들여다보라.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문득문득
법륜스님의 말투나 구조를 닮으려
애쓰는 나를 발견할 때면,
과연 나는 나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가 선택한 삶에 충실하려 애썼는지 돌이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