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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3년을 벼르던 다림질, 3초 만에 무너진 날.

by 길고영

올해 새로운 소모임을 두 군데나 나가게 되면서, 조금 더 단정한 차림의 나를 보여주고 싶어졌다. 가장 아끼는 옷을 가장 먼저 다려 입어야지, 결심했다. 여름밤, 에어컨과 전자기기 등 줄줄이 꽂힌 콘센트에 전기가 과부하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사용하지 않는 콘센트를 뽑았다. 그리고 다리미의 전원을 켰다. 달궈지자마자, 단 한 번 옷에 대었을 뿐인데, 다리미 모양 그대로 옷에 구멍이 났다. 다리미 밑바닥에는 폴리에스터 100%였던 그 옷감이 녹아 붙어 있었다. 2~3년을 벼르면서도 소재별 다림질 방법을 찾아보지 않았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가장 아끼던 옷이 사라진 것이 속상했다.

옷을 다린 게 대체 몇 년 만일까. 첫 직장 시절, 미국에서 FDA 심사관이 온다는 일정에 부랴부랴 다리미를 샀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리미와의 첫 만남은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치마와 블라우스를 갖게 되었고, 교복을 단정히 입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두세 벌 남짓한 교복을 빨고, 말리고, 다리고.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는 구김이 가지 않도록 빨고 말리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8년 전쯤, 지금 직장으로 이직을 설레어하며 블라우스를 15장이나 샀다. 하지만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생활의 얼룩이 묻고, 올해 남은 건 다섯 장뿐이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블라우스가 없다는 핑계로 새로운 블라우스를 3년째 사지 않았다. 가장 더운 날엔 블라우스를, 조금 시원할 땐 반팔 티를 입겠다는 계획만 해볼 뿐이다. 구입한 첫 해에는 빨아 말리면 말끔한 새 옷이 되었지만, 해가 갈수록 구김이 생겼다. 구김은 빨아도, 털어서 말려도 지워지지 않았고, 나는 몇 년간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지낸 것 같다.

첫 직장에서 내려온 지침. '유니폼을 다려 입으라'는 지시에 단정한 첫인상을 준비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FDA 심사관이라는 낯선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8년 전, 지금 직장에 처음 출근하며 새 블라우스를 고심하던 시절의 나 역시 새로운 환경에 잘 녹아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3년 동안 새로운 블라우스를 사지 않은 이유가, 정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어서였을까? 어쩌면 타성에 젖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로 탈바꿈할 용기가 없었던 건 아닐까.

다리미에 옷감이 눌어붙어 더는 사용할 수 없는 다리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 일상의 타성에 젖은 내가 아닌 조금 깔끔한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걸. 남은 네 장의 블라우스를 들고, 세탁소 문을 두드릴지, 아니면 이 기회에 용기를 내어 새로운 블라우스를 살지. 고민해 보는 밤이다. 결국, 나는 오랜 타성을 다리는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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