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칭 : 이반으로 살았던 몇일

1회 - 프롤로그

by 조성길

프롤로그: 목소리의 무게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고유한 목소리가 있다. 부모라면 수많은 아이들 틈에서도 내 자식의 목소리만큼은 주파수를 맞춘 듯 선명하게 잡아내기 마련이다. 나 역시 쉰을 바라보는 이 나이까지 내 아들 이반의 목소리를 아주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 목소리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다 꿰뚫고 있다고 믿었다.

“아빠, 이 문제…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어요.”

식탁 위에 펼쳐진 수학 문제집 위로 이반의 풀 죽은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하얀 종이 위에 빼곡한 숫자와 도형들이 아이의 작은 얼굴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갑게 대답했다.

“모르긴 왜 몰라. 지난번에 아빠랑 같이 풀었던 유형이잖아. 이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야.”

“그때도 사실… 겨우 따라간 거였어요. 죄송해요.”

이반은 말을 삼키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공손한 침묵조차 답답한 반항으로 느껴졌다. 내 아들이라면, 내가 만든 이 원칙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는 아이라면 적어도 내가 걸어온 길만큼은 수월하게 따라와야 했다. 음악이니 예술이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는 인생의 단단한 기반을 만든 뒤에나 누리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이반아, 아빠는 네 나이 때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풀었어. 네가 게을러서 그래. 음악? 그거 해서 뭐 먹고 살래? 음악은 취미일 때나 아름다운 거야.”

내 모진 말에 이반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에 대고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홧김에 내뱉은, 그러나 진심이 섞인 오만한 한 마디였다.

“내가 너라면… 그렇게 답답하게 살지는 않을 거다.”

그날 밤, 이반은 방에서 늦게까지 불을 끄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미세한 불빛을 보며 나는 내일 아침에 해줄 ‘조금 더 부드러운 훈계’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잠이 들었다. 꿈결에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작고 얇지만, 여러 겹의 슬픔이 섞인 복잡한 색깔의 목소리.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되어 깨어났다.

1막 1장: 열두 살의 중력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스치는 낯선 냄새였다. 내 방의 묵직한 서적 냄새나 아내의 은은한 화장품 향기가 아니었다. 옅은 땀 냄새와 문구용 풀 향기, 그리고 정체 모를 소년의 체취.

“이게 무슨….”

입을 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쇳소리가 섞인 중년의 저음 대신,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미숙하고 높은 음역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주위를 둘러봤다. 천장이 낮았다. 아니, 내가 작아진 것이었다.

낡은 캐릭터 커튼, 구석에 처박힌 태권도 가방, 그리고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악보들. 이곳은 이반의 방이었다. 나는 홀린 듯 전신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낯익은 소년이 서 있었다. 약간 뾰족한 턱선, 겁에 질린 듯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건 내가 어젯밤 그토록 몰아세웠던 내 아들, 이반이었다.

“이반아! 안 일어나? 오늘 수행평가 있다며!”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나를 부르는 저 호칭은 나를 ‘남편’이 아닌 ‘자식’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네… 저 지금 일어났어요, 엄마.”

내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단어가 너무나 생경해 혀끝이 떨렸다.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를 했다. 세면대가 턱없이 높았고, 비누를 쥐는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보드라웠다. 거울 속 아이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물이 닿은 피부가 팽팽했다. 이 아이는 매일 아침 이 작은 손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구나.

아침 식탁은 평소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다.

“형, 오늘 수학 숙제 다 했어? 아빠가 어제 엄청 화내던데.”

둘째 준우가 식빵을 입에 물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평소엔 기특하게만 보이던 준우의 영특한 눈빛이, ‘형’이 된 내 입장에서는 묘하게 가시 돋친 압박으로 다가왔다. 막내 현아는 내 무릎으로 달려와 매달렸다.

“오빠! 오늘 학교 끝나고 나랑 놀이터 가기로 했지?”

아이의 무게가 무릎을 타고 전해졌다. 평소엔 그저 ‘애들이 노나보다’ 하고 넘겼던 일상의 풍경이, 이반의 몸으로 들어오니 모든 것이 거대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아내—아니, 엄마는 바쁘게 내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이반아, 오늘 음악 시간 있지? 연습한 곡 잊어버리지 말고 잘해. 아빠 눈치 보느라 어제 연습도 제대로 못 했잖아.”

그녀의 눈에 서린 걱정을 보며 나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남편으로서 나는 아내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나는 늘 지시하고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들의 재능과 나의 완고함 사이에서 얼마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지, 아이의 시선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길, 이반의 책가방이 어깨를 짓눌렀다. 50대의 정신으로는 가뿐히 들 수 있을 것 같았던 가방이었지만, 열두 살 소년의 어깨에는 이 가방마저 하나의 거대한 세계처럼 무거웠다.

등굣길, 아이들의 시선과 자동차 경적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가깝고 위협적으로 들렸다. 신발 속 발가락이 꼼지락거릴 때마다 낯선 감각이 전신을 자극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아들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작고 치열한 세계 한복판에 던져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