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 자전거핸들 너머의 세계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막내 현아였다.
“이반아! 이반아! 이것도 가져가야지. 오늘 오후에 비 온대.”
현아가 내민 것은 작고 알록달록한 접이식 우산이었다. 나는 멍하니 우산을 받아 들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마워, 현아야. 잘 쓸게.”
현아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킥킥거리며 웃었다.
“우와, 우리 이반이 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해? 아빠한테 혼나더니 철들었나?”
현아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혀를 쑥 내밀고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우산을 가방 옆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당 구석에 세워진 자전거를 끌어냈다. 안장에 올라타 페달을 밟았다.
“세상에….”
입 밖으로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무릎이 삐걱대거나 허리가 묵직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페달을 살짝만 밟아도 자전거는 공기 위를 달리는 것처럼 매끄럽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핸들을 잡은 손이 작아진 만큼, 골목길의 풍경은 평소보다 훨씬 낮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골목을 돌자, 편의점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교복 위에 헐렁한 후드티를 걸친 소년들이 입에 사탕 하나씩을 물고 떠들고 있었다.
“어, 이반이다! 야, 장이반!”
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자전거 브레이크를 꽉 잡았다. 아이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너 어제 ‘그로우어 가든(Grower Garden)’ 6단계 깼냐? 그거 마지막에 식물 괴물 나오는 거 진짜 장난 아니던데.”
자전거에서 내려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로우어 가든’, 식물 괴물…. 처음 듣는 단어들이 귓가를 스쳤다.
“어… 그게… 나는 아직 못 깼는데.”
“헐, 진짜? 네가?”
아이들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맨날 피아노 쳐서 손가락 제일 빠른 놈이 그걸 못 깨? 너 어제 아빠한테 혼나서 멘탈 나갔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요즘 좀 바빠서 연습을 못 했어.”
아이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비료를 써야 성장이 빠른지, 버그가 생겨서 게임이 튕겼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나는 그 옆에서 묵묵히 자전거를 끌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반이는 매일 아침 이런 대화들 속에서 학교로 향했던 모양이다.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우고 자물쇠를 채우려다 손을 멈췄다.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0, 7, 2, 8. 철커덕,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내 정신이 알지 못하는 이반의 일상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학교 건물 안은 아이들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사방이 똑같은 교실 문이었다.
“여기가… 몇 반이더라….”
벽에 붙은 반 번호를 확인하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짧게 깎은 머리에 눈매가 서글서글한 아이였다.
“야, 장이반. 너 어디 가? 우리 반 지나쳤잖아.”
“아… 오늘 좀 정신이 없어서.”
“야, 너 오늘 좀 이상하다? 꿈에서 밤새도록 게임이라도 했냐?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깼어?”
“어, 좀 그런 것 같네.”
그를 따라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왁자지껄한 소음, 분필 가루 냄새. 낯익은 풍경인데도 내 자리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끈을 꽉 쥔 채 교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킥킥거리며 내 책상을 툭툭 쳤다.
“야, 네 자리 여기잖아. 지우개 가루 산산조각 내놓은 창가 맨 뒷자리.”
“아… 맞다. 고맙다.”
나는 자리로 가 앉았다. 책상 구석에는 정말로 잘게 부서진 지우개 가루들이 흩어져 있었다. 창밖으로 운동장이 보였다. 이 작은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학교 운동장은 평소보다 훨씬 넓고 막막해 보였다.
나는 이반의 낡은 필통을 만지며, 이제 막 시작될 아들의 하루를 가만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반아, 넌 매일 이런 하루를 시작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