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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Sep 29. 2022

오늘부터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100일째 되는 날이,

Writer's block Diary : 1일째

Photo by Marcel Eberle on Unsplash


오늘부터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100일째 되는 날이 12월 31일이라고 한다.


한 뉴스레터에서 읽은 문장이다. 하룻동안 밀물과 썰물처럼 귀와 마음을 들고 나는 말들이 대개 그, 까먹겠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걸 보면 까먹지 않았음을 무의식이 증명해낸 셈이다. 사실 나는 매사에 뭐든 잘 까먹는다. 동시에 괴물 같은 호기심으로, 잡다한 정보들을 끌어모은다. 만화 모아나에 등장하는, 보석만 모으는 소라게 괴물처럼.


사람의 앞면을 의식이 관장하고 뒷면을 무의식이 관장한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그러모은 정보를 모조리 뒤를 향해 던진다. 돌아보지도 않고서. 그러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어떤 것들은 자생한다. 그것들을 돌보고 기르는 방법을 전혀 모르므로 자생하는 까닭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지하지만, 어쨌든 어느 날 그 자생한 놈들이 의식의 운동장 한 가운데 어떤 단어나 문장을 툭 떨어뜨릴 때가 있다.  방금 자른 메두사의 머리 중 하나인 양, 그것은 꿈틀댄다.


‘오늘부터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100일째 되는 날이 12월 31일이라고 한다’.


어쩌면 무의식은 소화불량에 걸린 보아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화하지 못한 문장 중 하나를 뱃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소리 없는 트림과 함께 고스란히 토해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늘 그 토사물에 반응한다. 지금 쓰는 이 일기 역시 바로 그런 자극에 대한 반작용이다. 아마존 정글 한가운데, 구덩이 속에 들끓는 구더기들 같은 자극.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창작에서 손을 뗐으며, 심지어 남은 인생도 창작하지 않으며 살아갈 궁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다. 쓸 수 없고 써지지 않고 안 썼고 마감을 미루었고 결국 에이전시에서도 재촉하지 않는 논외인간이 되었고 회사에 입사했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술 마시고 일하고 술 마시고 울고 웃고 떠들고 만나고 헤어지고 하여간에 미친 사람처럼 글 쓰는 거 빼고 다 했고, 그러면서도  창작자로 살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이후의 삶에 대해 공포와 낙담, 체념과 불안, 자기긍정과 자기연민을 반복하다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나는 떨었다. 소설가로, 작가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수십 번도 넘게 말해주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더 이상은 모르겠는 지점에 도달했다. 사막의 여관에 홀로 묵는 투숙객처럼, 영원히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가.



궁금하다. 다른 작가들도 나처럼 자극에 대한 반작용으로서만 글을 쓰는지. 고갈된 자리에 뭔가가 고일 수도 있는지. 왜 쓰는지. 왜 사는지. 왜 쓰면서 동시에 사는지.


이런 생각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도보 10분 거리에서 작가 수업을 진행한다는 공고를 떠올린다. 심지어 장르도 다른 글쓰기 수업이다. 이미 작가인데 뭘 더 배운다고 달라질까 싶은 마음 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작가인가 하는 마음이 반이다. 매번 그랬듯이 실패하겠지, 중간에 관두겠지. 넌 늘 그러잖아. 예민한 사진사가 화풀이하듯 프레임을 갈아치우잖아. 아니야, 어쩌면. 아니야, 어쩌면 새로운 자극이 내게 반작용을 하게 만들지도 모르잖아. 그거면 되지 않을까? 죽었다고 생각한 개구리가 미세한 전류 때문에 번쩍! 눈을 뜰지도 모르잖아. 알 수 없는 얼킴과 설킴의 힘으로 다시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이 끊어진 회로를 연결하는 방법이 무엇일는지 몰라도, 어쨌든 무언가를, 아무튼 어떻게든. 하수구 안쪽에 걸린 머리카락처럼, 글에 대한 미련은 시원하게 사라지는 종류의 미련이 아니다.


마음 속 탁자 위, 동전이 세차게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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