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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26. 2022

시, 감정을 어르고 또 달래며

Writer's block Diary: 22일째

Photo by Daniele Franchi on Unsplash


한국만큼 시집이 많이 팔리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그와 관련돼 있는지는 몰라도 한국인들만큼 우울에 시달리는 민족도 또 없으니, 어쩌면 부정적인 감정을 어르고 달래는 가장 건강한 방식으로서 한국인들은 시집을 읽는 편을 택한 게 아닐까 싶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다루는 법이 살아감에 있어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감정 장애를 겪어 정신과에 찾아가는 데 부정적인 인식이 줄어든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시골에서도, 자라고 나서 발 디딘 서울에서도, 감정은 혼자만의 몫이었고 그것을 잘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좀체 만나기 어려웠다. 


시를 좋아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 말이, 감정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던 순간. 몇 줄도 안 되는, 때로는 단 하나의 문장, 아니 단 하나의 어구가 평생토록 마음의 심지가 되어주는 건, 오직 시만이 부릴 수 있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도, 시 수업을 들을 때도, 쓴 시를 합평받을 때도, 함께 시작한 이들이 하나 둘 시인이 되었을 때도, 마침내 시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도, 몰랐다. 시라는 것은 쓰는 사람의 감정을 낱낱이, 샅샅이, 고스란히, 그대로 담지 않으면 읽는 이에게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내 시는 가슴이 아니라 죄다 머리로 쓰여졌었다.


무서웠던 것 같다.


스스로의 감정 앞에서는 늘 흐물흐물해졌고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최승자와 실비아 플라스를 무척 좋아했던 터라 시에 몰두하다보면 그들의 인생길을 따라 걷게 되지나 않을까, 겁을 먹었던 것도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주위의 시를 쓴다 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상했다. 상식의 세계에서 용인될 정도로 스스로의 이상함을 조절할 수 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이제 이름을 대면 알만한 좋은 시인이 되었고. 나는 후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이를테면 감정이라는 배를 타고, 매일 뱃길을 나서면서도 멀미를 하지 않을 자신이. 무의식의 바다에 그물을 던질 자신도, 묵직해진 그물을 끌어올려 도대체 무엇이 올라오는지 확인할 자신도 결코 없었다.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지 몰라서인 것 같다. 그저 스스로 익숙해지는 것 외에 피해갈 길 없는, 어서 흉터가 되기를 바라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은 없는, 그런 시기란 건 누구에게나 있는가.


쉬기 위해서, 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껴둔 연차를 냈다. 그래도 쉬지 못하고 집안일을 하고 고양이 목욕을 시키고 하루종일 종종거렸는데... 저녁이 되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이윤설 시인의 시집을 꺼내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러리라 생각은 못했다. 


이 사람은 내가 아닌 타인이 맞는 건가. 어쩌면 이렇게 하고 싶던 속마음 말만 골라 써놓았나. 아니,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몰랐는데 시를 읽다가보니까 비로소 내가 이름붙이지 못했던 감정들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를 자각하게 되었다고 해야 더 맞겠다. 복받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래, 이래서 시를 좋아했었지. 그래, 이래서.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원래 이렇게 얻은 휴일에는 글을 쓰지 않으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었는데, 오늘은 자료도 조사하고 쓰고 있는 글을 내 속도로 또 조금 썼다는 것이. 신기하다. 참 이상하다. 이제는 정말 바닥을 박박 긁어도 무쇠 바닥이라 아무것도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그리고 생각했다. 써야만 하는 글이 아니라 쓸 수밖에 없는 글을 향해 간다는 것은, 어쩌면 감정이라는 배를 타고, 매일 뱃길을 나서면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에 멀미마저도 견뎌내는 일은 아닐까 하고. 좋은 시인이 된 내 옛날 문우들은, 이윤설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도 모두, 모두 시를 통해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그리고 무의식의 바다에 그물을 던질 자신도, 묵직해진 그물을 끌어올려 도대체 무엇이 올라오는지 확인할 자신도 당장은 없더라도, 쓸 수밖에 없는 글을 향해서 가는 와중에 그런 자신감이 하나 둘씩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모여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하여 목이 가느다란 개미가 조심조심 다가와 내 눈물을 옮겨가지 않을까 한다 

개미들이 그걸 나누어 먹고 배부른 잠을 일렬로 누워 자면서 가난한 집 어버이와 새끼들처럼 다정하니 나란할지도 모르겠다 

하여 나도 길을 떠나고 개미들도 떠나 각자가 이 세계를 하염없이 걸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는 채 우리는 걷고 걸으며 일렬의 눈물을 낳고 

홀쭉해진 배를 또 누군가의 눈물로 채우고 찬 이슬을 피해 어둠의 포대기를 덮고 또 하루를 살아낼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우리는 낯익고 문득 사랑하는 습관은 

서로 나눈 피의 맑은 원액, 앙금이 가라앉고 뜨는 맑은 눈물을 나누어 마셨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를 부르지 않았으나 나는 그를 돌아보고 그는 나에게서 멈춘다 우리가 시계의 시침과 분침으로 멈추었을 때 시간만은 기억할 것이다 

그때 우리 사이를 신이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바람의 길목에서 우리는 쓸쓸하고 소란하고 춥다 그리고 멈추었던 시계가 움직이며 우리는 또 멀어질 것이다 

하여 우리는 신의 구슬로 흩어져 구르지만 어딘가에서 하나의 심장으로 꿰어져 이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신은 더이상 스쳐지나가지 않으며 그의 목에 우리는 두 팔을 둘러 안고 아이처럼 기뻐 반짝일 것이다 

개미들도 허리를 졸라맸던 끈에서 놓여나 우리 주위에서 동심원으로 동심원으로 눈물처럼 영롱할 것이다

- 개미와 나, 이윤설


***


Writer's block Diary 시리즈 1~20일째 글은 아래의 브런치북 <작가들은 대체 왜 그래?>로 묶어둔 상태입니다. 브런치북과 매거진의 글은 한데 묶을 수가 없는 관계로 부득이 21일째 글부터는 매거진 <라이터스 블록 다이어리>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계속해보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이전 글을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 브런치북을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writersbl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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