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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Nov 01. 2022

해묵은 기록으로부터, 거듭되는 탈출

Writer's block Diary: 23일째 

Photo by pure julia on Unsplash


노트들이 있었다.


색색의 펜과 스티커와 장식으로 잘 꾸며진 다이어리도 아니고, 벤저민 프랭클린식 자기 계발에 심취한 샐러리맨의 저널도 아니었다. 방학의 끝물에 몰아서 쓰는 선생님을 위한 일기장도 아니었고, dear.diary 라 부르며 자그마한 자물쇠를 보호막 삼아 가슴 속의 비밀만 모아둔 보물상자도 아니었다.


내게 그 노트들은 그냥 허허벌판, 모래사장이었다.


선악도 좌우도 없었다. 가치도 판단도 없었다. 모래사장에는 단지 씨앗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미래와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상상과 소망, 주관적인 의견과 때로는 새로 발견한 과학적 사실, 언젠가 써먹을 네이밍, 좋아하는 만화의 일부를 베껴그린 그림, 아름다운 남의 시, 흥얼흥얼 떠오른 멜로디에 붙일 나만의 가사 따위가.


하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암담한 색깔에 물들어 있었다.


노트들은 각각 다른 모양과 두께를 가졌지만 이름은 같았다. 정확한 명칭은 잊었으나 'Set me free 노트' 비스무리한 이름 뒤에는 1, 2, 3... 을 더해 네임스티커를 붙여두어 시리즈로 만들었다.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 수험생을 거쳐 회사원이 되고, 갖가지 일터를 떠돌 무렵에 노트들은 권이 넘어 있었다. 컴퓨터의 발달로 점점 노트를 쓰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노트들은 이삿짐의 1번 점검 대상이었다.


그리고 노트들은 어느날 화형식을 맞았다.


사람의 생각은 하루 아침에 뒤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차츰차츰 변화한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무도 언제를 기점으로 완전히 변했다고 말할 수 없다. 매일매일 잠들었다 깨는 그 사이사이 겪는 일로 인해, 또는 겪지 않은 일로 인해, 우리는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인간으로 거듭난다.


노트들을 태웠던 건 거기 담긴 기록들이 단순히 유치해지거나 빛바래져서만은 아니었다. 내 생각이 점프하는 속도를 어느 시점 이후로 노트들은 따라잡거나 담을 수 없었다. 단정적인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다른 국면이 제시되어 어떤 것도 도무지 단정할 수가 없어 어지러워졌다.


게다가 이십 대의 끝물, 5년 가까이 살던 인천을 떠나기 위해서는 상징적인 결별의 행위가 필요했다.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쥐꼬리만한 급여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견뎠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한군데서 오래 붙박일 수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연습이 끝나고 마침내 이사를 할 기회가 왔을 때, 그동안 쌓여있던 많은 짐을 버렸다. 헤어진 연인을 잊기 위해서 미용실에서 충동적으로 숏컷을 하는 여자처럼, 과거라는 허물을 벗고 싶었다. 새롭게 사고하기 위해서, 가벼워지기 위해서,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화형식 이후에도, 나는 과거의 어두운 생각과 쉽게 결별하지 못했다.


노트들을 떠나보내고도 컴퓨터 속에 새로운 문장을 쌓아올리는 시간보다, 주기적으로 옛글을 살피며 단어 하나 하나에 집착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되풀이하여 읽을 때마다 옛글에는 고쳐야 할 부분들이 한가득 눈에 띄었지만, 사실 아주 사소한 기술상의 문제에 집착하며 쳇바퀴를 돌렸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기억과 추억에 대한 나의 태도와 비슷한 대응 방식이었다. 차마 이것까지 어떻게 버려... 하는 망설임. 이것마저 없으면 대체 뭘 붙들고 살아... 하는 두려움.


그러나 물건이 낡아서 쓸 수 없게 되었다면 버려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물건을 들일 자리가 생긴다.

그러나 생각이 낡아서 없게 되었다면 버려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생각을 들일 자리가 생긴다...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소리지만 뭐, 그렇다.


이제 삼십 대의 끝물, 더이상 예전의 기록을 찾아보지 않는다. 폴더는 심해 깊숙히로 사라졌고 어떤 글들은 소실되고 유실되어 복구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나 이제는 모두 다 지나가버린 일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영토에 서 있다. 내 생각의 국경을 넘어 한참을 달려와 뒤를 바라보면 먼지구름 사이로 보이는 건 오로지 먼지구름 뿐이다. 다만 나는 그때와는 도저히 같지 않은 인간이 되어, 무엇인가를 또 끄적거리고 있다. 나를 미래로 데려다 줄 어떤 다짐들을, 소망을 담아 한 줄 한 줄 눌러적으며.


언젠가는 이런 기록들도 태워없앨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


Writer's block Diary 시리즈 1~20일째 글은 아래의 브런치북 <작가들은 대체 왜 그래?>로 묶어둔 상태입니다. 브런치북과 매거진의 글은 한데 묶을 수가 없는 관계로 부득이 21일째 글부터는 매거진 <라이터스 블록 다이어리>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계속해보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이전 글을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 브런치북을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writersbl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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