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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각로 강성길 Dec 27. 2016

합리적인 사고의  장애물 `익숙함`

편견의 주범  `익숙함`



직장 다닐 때 이야기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사무실 주변 음식점에서 직원들과 어울려 먹고, 매일 먹는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던 시절이었다.
아마 그날도 평소처럼 구내식당에서 욕심의 흔적이 역력한 식판에 흐뭇해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직장에서 점심은 어떠한 의미인가? 긴장된 업무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 아니던가?
특별히 어색한 점심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즐거운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매번 반복되는 후회지만 식판을 잡으면 식탐이 발동하여 적정량의 음식을 온전히 담아본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식사가 막바지에 이를 때쯤 깨닫게 되는 욕심의 흔적, 아니 옆의 동료가 보면 미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것 또한 점심시간의 한 풍경이기도 하다.


그날도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 중 외제 차가 이야기가 나왔다.

직원이 외제차를 구입했으니  `고사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가볍게 `톡` 던진다.

그러고 나서 신 차를 구입한 직원을 슬며시 쳐다본다.

직장생활 2박 3일 한 직원도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 일상적인 `쨉`은 기름 친 장어처럼 자연스럽게 빠져나간다.

그때 생뚱맞게 나온 응수가  바로 `교육`이었다.


`교육`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본인도 또한 직장 담당자도 먼 나라 사건사고 정도로 관심이 되지 않는 대상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욕심부린 식판에 주어진 시간 내 싹쓸이 하기도 정신이 없는데 느닷없이 대화의 화살이 나를 향한 것이다.
"그럼 한번 가볼까?" 지나가는 말을 던져놓고, 결국 그 날 점심도 짠 밥 처리하는 일상적인 처방을 내린 날이기도 하다.
점심 먹으면서 한 대화 대부분은  식판의 남은 음식과 함께 짠 밥 시키는 것이 평이한 구내식당의 일상이다.


며칠이 지난 후, 갑자기 교육 담당자가 느닷없이 `교육`을 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 날 점심시간에 지나가는 바람처럼 한 소소한 담소 다음 날, 소위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에서 실시하는 일명 `힐링 교육`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며칠 후, 교육 가는 날은
전 날 밤에 비 온 뒤라 씻겨진 하늘이며, 거리며 그리고  햇살까지 교육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한 명 두 명 그리고 나까지 네 명.
인근 지사 직원과 사전 연락하여 기차역 광장에서 만났다.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드렁크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미숙함으로 새 차임을 드러내 놓고 강조하였다.
`오늘은 왠지`라는 조금 오래된 서생원의 유행어가 생각나는 날이기도 하다.
가령 "오늘은 왠지 한 공간에 있는 그대들과 가벼운 담소로 즐거운 교육 여행을 가고 싶다" 심정으로 차에 동승했다.


답답한 시내를 벗어나 시원한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쯤,
D시에 사는 직원이 P시 지사에 근무한 시절에 불편했던 일상을 이야기하는 끝에 대중교통 시스템 때문에 P시에서 겪었던 한 두 개의 불쾌했던 추억을 일반화하여 폐쇄적인 도시라 와전하여 언급하였다.
같이 있던 직원 중에 P시에 살다가 지금은 D시에 근무하는 직원이 발끈하여 D시가 폐쇄적인 면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고 맞받아친다.


갑자기 D시와 P시 간의  지역 대결 양상으로 비화하여 쉽게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다.  

서로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당황하여 조용히 있던 나에게, 나의 의견 여부로 가리자는 쪽으로 흘러갔다.

얼떨결에 두 도시의 폐쇄성 여부가 객관적인 자료에 의한 판단이 아닌 개인의 주관적인 입장 표명으로 결정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서울에서 살다가 얼마 전에 D시로 내려온 내가 편견 없이 공정하게 양 도시의 폐쇄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낯선 지역에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옮기게 되면 원래 있던 사람들이 `텃세`를 한다고 느낀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다.

낯선 환경에서는 동물은 물론 사람도 긴장을 하고 사주경계를 하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한 현상이다.


처음에는 집 주위의 골목길을 익히고, 주변의 시장이나 편의시설을 알아가고, 하루하루 생활하다 보면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아는 것만큼 더 자세히 볼 수 있으며 결국에는 `익숙`해지는 것이다.
교통체계, 복지시설 등 지역사회 제도에 관심이 갈 정도면 이웃이나 직장에서 어느 정도 낯선 불편은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후순위로 새로운 지역에 적응하는 분야는 뭐니 뭐니 해도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이다.

기존 주민이나 동료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애증을 통하여 쌓아온 동료애, 이웃애다 보니 뜨내기처럼 보이는 신참자에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새로운 전입자가 먼저 다가가 소위 `신고`하면서 인사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 사람들이 어느 정도 받아주나`가 결정적인 요소이다.


동료 또는 이웃으로 인정해 주는 기간이 전입자가 인내하는 기간보다 길다면 폐쇄적인 인상 즉 텃세가 심하다고 단정할 것이다.

이웃이나 동료로 인정해 주는 기간이 설사 길다 하더라도 전입자가 견딜 수 있으면 폐쇄성 정도가 덜 강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적응력 차이에 의하여 새로운 지역이나 직장의 폐쇄성이 결정되는 것은 극히 주관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전입자의 정착여부는 누적된 통계적 자료를 살펴 봄으로서 알 수 있다.
외부 사람들이 전입오기를 꺼리거나, 외부 사람들이 적응을 못하고 떠나거나 또는 기존 주민의 울타리가 지나치게 높아서 외톨이가 되든지 간에 외지인 비율이 갈수록 줄어드는 지역이나 직장은 틀림없이 폐쇄적인 도시이거나 직장이고 최대한 너그러운 관점에서 보아도 변화가 어려운 도시 또는 직장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단기간에 느끼는 폐쇄성 여부는 낯설어서 느끼는 불편함이 폐쇄성으로 오인하여 느끼는 오류일 수 있다.

때문에 일정기간 생활하면서 익숙해져 있는데도 불편하거나 어색하면 그 도시는 폐쇄적인 도시라고 단정 지어도 좋다.


이러한 면에서 D시와 P시 간의 폐쇄성 여부에  `교통카드`가  선명하게 클로즈업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D시의 대중교통카드는 오직 D시에서만 사용 가능한 카드였으며, 교통 카드에서 야기되는 사소한 민원 처리조차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답답한 교통카드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D시 시민들은 늘 사용하기 때문에 `익숙함`으로 인하여 폐쇄적이고 불편한 제도 여부조차 인지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행객 입장에서 한두 번 사용하는데 보증금도 내고 카드를 구입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이용 후 보증금 환불이 까다로운 것이 더 문제였다.

그렇다고 현금을 내고 타자니 불편함이 그지없다. 당시 D시 교통카드시스템에 여행객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볼 수 있다.


반면에 P시 교통 카드시스템은 전국에서 사용하는 신용 카드도 물론 사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P시에  처음 오는 여행객일지라도 혼란 없이 당황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P시를 여행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오직 교통카드와 일정 기간 동안에 해당하는 교통카드시스템만 가지고 D시와 P시에 대한 폐쇄성 여부를 동료 직원에게 말하는 것은 경솔하고 주관적인 것이기에 우물쭈물 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익숙함`이 합리적인 사고에 장애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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