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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각로 강성길 Jan 20. 2019

유니세프(unicef) 한국위원회

내가 바라보는

유니세프(unicef) 한국위원회

내가 바라보는       


1997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호기심으로 되새겨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응답하라 1997’ tvN 드라마이다. 비 오는 날, HOT의 토니 팬클럽 공식 우비를 입고 나간 아빠를 황급히 쫓아가서 이 우비는 입으면 안 된다고 큰 소리로 ‘엉엉’ 우는 성시원이 살던 1997년, 성시원에게 우비란 아빠에게조차도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다음이 환경단체의 1997년 10대 뉴스이다. 대만 핵폐기물이 북한으로 반입되면 핵폐기물 관리시설을 최소한도 갖추지 못한 북한으로 인해 한반도의 방사능 오염화는 시간문제일 수 있다며 지금 대만의 핵폐기물 북한 반입을 막기 위해 환경단체들은 해상훈련도 마다하지 않고 반대 운동을 벌였던 1997년, 환경단체에게 있어 ‘핵’은 후손들에게 절대로 물려주어서는 안 될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1997년 1월  한보철강 (현 현대제철) 부도 시작으로 삼미, 진로, 한신 공영, 쌍방울, 해태, 뉴코아, 등 대기업이 연쇄 부도 처리되면서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건이 발생한 1997년, 대한민국은 IMF 외환사태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국가가 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정부는 부패근절과 세계 경제 방향 제시를, 기업은 과도한 중복투자 지향과 기술 혁신 그리고 개인은 합리적 소비라는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1997년을 어떻게 살았나? 대한민국을 한 단계 승화시킨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꽃피는 춘(春) 3월 직장에서 연애를 시작하고 그 해 늦가을 11월에 결혼했다. 다음 해 지금의 큰 아이가 태어나고 8살이 되는 1997년, 초등학교 입학은 결혼생활의 결과가 처음으로 외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의 구체적 흔적이었고 동시에 내적으로는 학부모가 되는 영광의 기쁨을 얻었다. 자라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아이를 보면 외모만 어린애지 아빠와 똑같은 ‘붕어빵’이라면서 돌아서서 키득키득 웃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초등학교 입학 때는 1965년, 6.25 전쟁으로 전국이 폐허 된 이후이기에 먹고 살기 어려워 서독에 광부로, 간호사로 파견되는 소식으로 흑백 TV 뉴스를 도배하고 서울 부산 등 대도시 대부분이 판자촌으로 자리 잡았고 대다수 국민이 절대빈곤으로 보릿고개를 온전히 넘기기 위해 산으로 들로 들개처럼 헤매던 그 시기에 코 수건을 가슴에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니 학교생활이 오죽했으랴!     


그레도 학교에 가면 국제기구(unicef) 도움으로 점심에 나오는 노란 강냉이 죽을 먹을 수 있어 학교 가는 것이 마냥 즐거웠고 유일한 낙(樂)이었다. 사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강냉이 죽인 줄도 모르고 그저 해맑게 동네 까까머리 녀석들과 장난치면서 도시락 뚜껑에 묻은 마지막 죽까지 혀로 할 터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이 나라의 미래는 나와 같은 어린이들이 있었기에 강냉이 죽은 단순히 점심 한 끼가 아니었다. 나의 희망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미래도 그 속에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 암울하고 빈곤한 초등학교 생활조차도 ‘만병통치약’과 같은 ‘과거’라는 여과지를 통과하기만 하면 오히려 아련한 추억으로 바뀌게 된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60년대 대부분 어린이의 생명연장 줄인 강냉이 죽이 다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은 나만의 씁쓸한 추억일까?  1965년 그 당시의 ‘나의 모습’이 지금도 이 지구 상에  있다면 나는 유네스코를 통하여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동요처럼 어려운 어린이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아이의 1997년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unicef에 후원 신청의 인연이 2018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살아오면서 ‘나’ 스스로 자찬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unicef와 함께 온 세상 어린이들과 그동안 손잡고 있었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단법인 유니세프(unicef) 한국위원회는 정식 명칭에 나와 있듯이 우리나라 수 천 개의 사단법인 기부금 단체 중 하나일 뿐이다. 국제기구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다 보니 막대한 후원금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언론 기사들이 종종 있다.      


“2017년 유니세프한국위원회는 약 1,359억 원을 모금해 약 1,159억 원을 유니세프 본부에 개발도상국 어린이 지원금으로 송금했습니다. 여러분이 100원을 기부하시면 이 중 85원이 송금된 셈입니다. 나머지 15원 중 2원은 인건비로 사용되고, 3원은 관리 운영비, 10원은 아동권리 옹호 및 PR 등 국내 사업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높은 송금률은 도움 주는 34개 유니세프 국가위원회 중 가장 높으며, 국내 구호단체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그룹에 속합니다. “라고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공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모금액 1,359억 돈의 힘이란 것이다. 이 힘을 단체가 아닌 사람(사무총장, 위원 등) 능력이라 생각하고 후원자가 생각하는 동떨어진 언행을 하면 안 된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과 위원들의 기본 자격은 어느 기부단체에 기부했든 간에 최소한 기부 기간이 15년 이상인 분들이어야 한다. 기부 금액은 중요하지 않다. 돈 있는 사람은 한 번에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부 기간은 빈부의 차이보다는 기부에 대한 세월의 탑(기부 개념 정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100원 기부금 중 3원의 관리 운영비이다. 3원의 운영비가 전체로 보면 33억 이상이다. 공시내용으로 보면 3,397,098,616원으로 되어 있다. 이 내용을 오히려 상세하게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이트에 상시 공시해야 한다. 상세 내용을 국세청에 미루면 안 된다. 남에게 선(도움)을 베풀기 전에 본인이 먼저 최소한 악은 아니어야 한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바른생활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     


관리 운영비와 인건비도 그렇다. 오히려 반대로 100원(1,359억) 기부금 중 3원(33억)을 인건비로 쓰고 2원(29억)을 관리 운영비로 지출하는 방향이 바람직한 미래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건강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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