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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Nov 04. 2022

생존해봅시다

우선 살아남아봅시다

자, 이제 순항하던 배에서 구명조끼 하나 없이 탈출했고, 지금 나는 조난 중이다. 다급해 보이지만, 내게는 몇가지 옵션이 있다. 지나가는 배에 다시 상선하는 것, 헤엄쳐 미지의 섬을 발견하는 것, 혹은 말라 죽거나 익사하는 것. 거대한 풍랑과 강렬한 뙤약볕을 막아주던 선박의 그늘은 이제는 없다. 혹독한 환경 가운데서도 살기를 각오했다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자발적 조난을 자청한 이상, 일말의 자존심은 지켜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배에서 뛰어 내렸는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도 못한채, 배의 운항을 위한 동력원이 되길 거부했다. 처음,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한 모험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근원적으로는 불확실과 그로부터 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어째서 안전한 선체에서 벗어나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는 것을 두고 덜 불안하다 할까. 나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누구도 아는 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배가 노예들을 가득 실은 노예선이라면, 약탈을 일삼는 해적선이라면, 혹은 자신들이 죽은 존재인지 모르는 유령선이라면. 이상한 상상일 수도 있으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도 그 배의 정체를 아는 이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배의 정체가 무엇이 되었든, 내 손에는 방향키가 주어져 있지 않았다. 나는 생존을 담보로 생명력을 내어주는 계약 관계 속에 있었다. 배의 악마는 조용히 말을 건넨다. '네게는 스스로를 먹여 살릴 능력이 없다. 내가 너를 거두겠으니, 나의 말에 복종하라. 종신토록'


신에게서 버림받은 저주로 나는 자유를 박탈 당했다.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역이었다. 죄에 대한 대가. 노동이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라면, 노역은 존재를 결박한 채 쓰레기 불구덩이로 내던지는 행위였다. 나의 자발적 조난은 일종의 엑소더스였다. 목줄이 채워진 가축 개에서 야생 늑대로의 퇴행 진화. 그것이 내가 꿈꾸던 삶이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민족의 역정과 수모는 예견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애굽 노예의 삶을 그리워 하며 모세를 사신에 비견하며 맹비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신의 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존재의 지속을 위한 기본 요건이 되는 생존을 책임져야할 의무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막 전갈의 먹이가 될 지언정, 존재를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나를 덮쳐오는 질문 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이야기는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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