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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Sep 20. 2022

퇴사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1)

다시 니체를 들다

 

1. 수습하는 인생

 퇴사 통보하고 맞이하는  주말. 여느 날과 다를  없던 아침, 문득 초조한 감정이 들었다. 옳은 결정이었을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파고를 그리는 한때의 감정이었고, 이성이 마비가 되었던  아니었을까? 하지만 후회나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은 이미 저질러졌고, 나는 수습에 나서야 했다.


 돌아보면 나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자. 어쩌면  이름이었어야 .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자리라도 연명할  있었지만,  운이 언제까지 따라다닐지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충동적인 퇴사는 아니었음에도, 이토록 불안한  과거의 상처가 덧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 중후반,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진장이었으나,  시간은 자유가 아니라 감옥이었다. 나의 의지는 속박된 , 오로지 감정의 이끎을 따라 오르내림을 반복했었다. 아무것도 잉태할  없었던  시절,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나의 무계획 퇴사 결정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반응은 다시 당시로 돌아갈까 하는 염려였다.  역시,  부분이 가장 염려되었다.


 나는 윤회를 믿는다.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영원의 굴레. 특히나 같은 환경, 같은 조건에서는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과학에 . 불교에서는 이를 카르마, 업식이라 부른다. 관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관성의 힘을 거스르으면 작용에 반하는 힘이 필요하고, 관성이 클수록   반작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반길 소식은 나는 한 번의 지독한 경험으로 내 업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극복한 셈이다. 그래서 희망적이다. 이번에도 수습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지만,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마무리 짓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2. 나는 가축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의 오감과 직감은 계속, 이건 아니라고 외쳐 댔다. 언젠가는 내팽개쳐질 부속품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는 건, 낭비를 넘어 죄악이라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봐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도 회사를 다녀야 할 대의나 미션이 없었다. 미래가 뻔히 보였다. 마약같이 주어지는 월급에 중독되어 다가올 재앙을 외면하고 과제를 미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아니 나는 관성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결단을 해야 했다. 아닌 건 아니었다. 어디로 갈지 결정하지 못했지만, 우선 멈춰야 했다. 제동에는 마찰이 있듯, 멈추기까지 주변과의 갈등이 있었지만, 그건 거쳐야 할 당연한 수순이었지, 걸림돌이 아니었다. 퇴사 후 첫 주말에 느낀 감정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빠르게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나의 내면의 솔직한 감정들이었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부터 줄곧, 어디로 가는가 하는 바 없이, 내몰리는 인생이었다. 내 인생에 나는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내가,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잃어버렸다. 나는 가축이었다.


3. 야생 야전서, 니체

 목동이 이끄는 무리를 이탈한 살찐 양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야생성의 회복이다. 홀로 서기가 필요한 때, 나는 야전서로 니체를 읽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니체는 나에게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왔었다. 니체의 아포리즘은 낮은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강렬한 상징과 비유에 이끌려 오랫동안 니체의 저서들을 탐독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니체를 지금에 와서 다시 꺼내 든 것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이었다.


 니체를 삶으로 품어 내기엔 지금의 내 수준은 너무도 미천하다. 이제 막 가축인 것을 인지한 자가, 하늘 위의 독수리가 될 수 있으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니체를 통해 새로운 상상을 품는다.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한다. 그렇기에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될 수 있다 이다. 상상은 ‘되기’이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자아는 거울 통해 상상된 이미지들의 집합체이다. 거울은 객관적 모습을 비춘다. 하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조합되는 바, 자신의 자아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는 일부만이 작용할 뿐이다. 우리는 보다 많은 존재들을 자아의 그늘 아래로 두고 있다.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망토를 두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무모함을 저지르다 뼈가 부러지고 타박상을 입으면 현실의 나는 슈퍼맨이 될 수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샌가 나는 어렸을 적 상상의 존재되기라는 놀이를 그만두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나는 될 수 없어. 자연스레 학습된 결과, 나는 시시하고 어디서나 볼 법한 이미지로 나의 한계를 결정짓고 있었다. 그러나 니체는 그 놀이를 회복하라고 말한다. 나는 더 높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4. 공허한 적용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의 무용론을 떠올린다. 책을 읽을 때에 고양된 정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책 읽기를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나는 이전보다 더 초라해짐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의 반복은 책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저자들의 공허한 주장에 혐오감마저 느끼며, 글쓰기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일체의 회의론에 빠져 들었었다.


 5. 차이와 반복

  다시 윤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리의 인생은 늘 동일한 것들이 회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봄에는 새싹이 자라나고 여름에는 잎사귀가 무성해졌다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시들해지며 겨울이 오면 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이 남는다. 그리고 다시 봄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새싹이 돋는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동일자로서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낳는 반복이다. 작년의 새싹은 올해의 새싹과 다른 존재이다. 우리는 변화의 주기를 두고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변화이다. 그것에서 우리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공허함과 허무주의의 극복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아는 것에서 절반은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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