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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Aug 28. 2022

준비 없이 퇴사하기

무계획의 계획

짱구 왈, "계획은 무슨! 계획대로 되지 않는게 인생이라는 거야. 똑똑히 기억해 둬!"


 당장의 어제 하루만 되돌아 보더라도 예측 불가능한 일들,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으나, 카페 직원의 실수로 카페라떼를 먹어본 경험이 있는가? 예상치 못한 유당 섭취를 내 두뇌는 계산 할 수 있었을까? 신발 밑창이 닳은 채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미끄러져 무릎이 까질 것을 신발을 고를 때의 나는 예상 할 수 있었을까? 잘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클라이언트의 변심으로 뒤엎어 질 것을 팀원 누구라도 예상 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은 '횡재'로 찾아오기도 한다. 고기 반근을 주문했지만, 그날 아들의 수시 입학 소식을 들은 아주머니의 기분 내킴으로 100g을 서비스로 받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오랫동안 입지 않은 바지에서 만원짜리를 발견하고는 과거의 내가 준 선물에 감사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는가? 매일 같이 잡아 먹을 듯이 팀원들을 갈구던 팀장이 하루 아침에 인사 발령이 나리라고 팀원 나부랭이가 예상 할 수 있었겠는가? 


 익숙한 패턴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어떨 때는 실망하고 어떨 때는 횡재했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 이분법으로는 사건의 실체를 알기 어렵다. 사건은 연속적이고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에는 불행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당장에는 횡재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내게 좋지 못한 것이 될 수 있다.  어제의 선택이 오늘의 성공일 지언정, 모레까지도 성공이라는 법은 없다. 인생은 길게 놓고 볼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일상은 이렇게 불확실성과 연속성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 것이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도 쉽사리 이야기 할 수 없는 가운데, 선택의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할 줄 아는 안목도 필요하다. 즉, 술을 먹는 것이 당장에는 나에게 '좋은 것'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쉽게 내리기에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너무 복잡하다. 거래처와의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서 술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마음에 드는 상대와 잘 해보기 위해서 술을 마셔야 한다면? 내 직업이 술과 관련되어 있어 생업이 걸린 일이라면? 이외에도 가정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가정하여 무엇이 가장 '좋은 것' 인지를 판단 내릴 수 있을까? 


 위대한 마법사 닥터 스트레인지 조차도 14,000,605개의 미래를 내다보며 한가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이조차도 성공 가능성을 놓고 따진다면, '불확실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이야기도 인류에게나 해당되는 성공이지 타노스에게 있어서는 '실패'의 시나리오가 된다. 좀 더 비틀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타노스는 우주를 멸망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타노스는 보다 장기적이고 소위 지속가능한 관점에서 우주 문명의 절반을 살리려 한것이다. 어쩌면 타노스의 계획이 '남은 자'들을 위해서는 더 나은 결정이 될 수 도 있던 것이다. 결국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선택은 무기한 연기 될 수 있다. 


불확실성을 이야기 할 때, 개인의 관점을 벗어나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이슈들에서는 문제가 더 복잡하다. 살아 보지 않았지만, 전해 들은 바로 1970년대말은 극도의 불확실성과 그에 수반된 불안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시대라 한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교수의  ⌜불확실성의 시대⌟(1977) 가 베스트셀러로 대중의 공감을 사고 있을 시기였고, 중동 전쟁과 1,2차 오일 쇼크, 베트남 전쟁과 공산화로 급박하게 전개되던 아시아 정세 등에서 당시 사람들의 초조함을 엿볼 수 있다. 그로부터 40년, 2017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C Berkely)의 경제학자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은  현 시대를 '초(超)'불확실성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하였다. 

 

 두번의 세대가 교체되는 동안, 우리는 눈부신 경제성장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우리는 이전 보다 더 없이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다.  러시아와 우르크라이나의 전쟁, 신 냉전이라 불리는 중국과 미국의 새 패권 다툼, 퍼펙트 스톰이라 불리는 초대형 경제 위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양극화 문제, 경험한 바 없는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고 있기도 하며, 인류 종말로 치달을 수도 있는 기후 문제, 식량 문제 등 나열 하기도 벅찬 위기가 우리의 숨통을 죄여 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세계 정세까지도 고려하여 개인이 내리는 선택의 최선 또는 차선을 찾을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그런 이상적인 존재가 있기는 할까? 


 어떤이는 그렇기에 우리는 선택을 무기한 연기해야 한다고 한다.  정말로 누군가는 '가만히 있는게'가 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익숙한 패턴대로 내리는 선택들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낭떨어지를 향해 내달리는 차의 운전자는 엑셀에서 발을 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멈추고 무위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흐르며 우리가 행동하기를 재촉하고 있다. 


 이쯤에서 이야기를 요약해보자, 첫째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미래는 우리의 예측을 아득히 넘어서있는 것이다. 둘째, 선택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세계의 복잡성으로 인해 무엇이 '좋은 것' 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 셋째, 결국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단과 선택을 무기한 연기 할 수도 없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은 이렇게 말한다. 

"너,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No plan.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 그러니까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 계획이 없으니까 뭔가 잘 못될 일 도 없고, 또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다 상관없는 거야." 


 여기서 관객은 무계획은 빈자의 삶의 방식이고 계획은 부자의 삶의 방식이라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생각 외로 대비가 뚜렷하지 않은 영화다. 기택이 말하는 무계획의 계획은 지상-반지하-지하라는 배경 구분처럼, 중간 지점을 갖는다. 지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획이 있어야 하지만, 지상으로 가기 위한 행위 자체에 의문을 제기 하는 단계에서 바로 이 대사가 나온 것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계획인가? 근본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영화는 시사하고 있다. 


 '준비 없이 퇴사하기'는 무계획의 계획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계획의 성질이며, 계획대로 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그럼에도 일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으로 인해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딜레마 상황 가운데, 지혜로운 선택을 찾아야 하는 근본적인 계획단계로의 이행인 셈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어떤 선택도 확신이 들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행하여야만 할 때, 가장 근원적인 가리킴은 믿음이다. 확신과 믿음의 차이는 불분명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반을 확신이라 한다면, 믿음은 보다 영성적인 기반이라 할 수 있다. 다소 클리셰 적이긴 하지만, 머리의 소리를 따를 것인가, 마음의 소리를 따를 것인가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준비 없는 퇴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결코 충동적이거나 우발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조금은 무모한 듯 보이는 선택이며, 합리화할 여지가 적다는 점에서 이렇게 이름 붙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부터 무계획이 계획인 준비 없는 퇴사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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