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scud Aug 09. 2023

#001_포스트 휴먼을 위한 애도

들어가며

2017년 9월 푸틴은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공지능을 새로운 국가 산업 패러다임 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미래의 주역으로서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 록 독려하는 한편, 인공지능이 가져올 기회와 위협에 대해 이야기했다. 


푸틴은 인공지능 연구에 대한 세계 차원의 공유를 주장하였는데, 겉으로 드러난 연대의 메시지와는 달리, 이는 미국과 중국의 독보적인 기술에 대한 견제로, 러시아의 뒤쳐진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조급함을 드러 낸 것이었다. 이는 적국보다 뛰어난 기술을 선점하는 것이 전쟁의 성패를 좌우했던, 지난 무기 경쟁의 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어김없이 푸틴은 같은 연설을 통해 미래 전쟁에서 무인 항공기 의 중요성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한편, 테슬러의 CEO, 일런 머스크는 푸틴의 발언에 반감을 표하며, 국가간의 기술 경쟁이 초래할 부정적인 결과를 우려하였다. 그는 일찍이 인공지능으로 촉발될 세계대전을 예견한 바 있었는데, 인간을 초월한 인공지능의 계산 능력이 종국엔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고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설한 것이었다. 


오늘날 기술에 대한 해석은 네오러다이트(기술에 대한 과잉 혐오)와 테크노크라시(기술에 대 한 과잉 신뢰) 사이를 오간다.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하는데 있어 과학 기술의 공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통제 강화는 예측불허의 세계에서 안정된 세계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통제 경향이 지구 단위로 확장됨에 따라 환경 문제를 비롯한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기술에 대한 이같은 믿음과 불신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한편, 지젝Slavoje Zizek은 인공지능-미래에 대한 대중들의 우려에,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 니라 “누가 통제권을 쥘 것인가” 라고 말한다. 즉, 기술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 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로, 19세기에 조직된 러다이트는 불평등한 착취와 분배에 맞선 투쟁 운동이었다. 그들의 분노는 기계를 향한게 아니라 악덕 공장주와 노동자를 밀어내는 시스템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지젝의 주장은 현실적이긴 하지만 어딘가 공허하다. 오늘날 기술이 몇몇 거대 기업과 국가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주요한 기술의 주도가 이들 거대 권력을 중심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기술의 진전은 정치, 경제적 외부 요인 뿐 만 아니라 기술 내부의 논리를 따르거나 다종한 의도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에 대한 통제권을 특정 집단이 독점하고 있기에 이를 민주적 방식으로 분배하자는 식의 이야기는 (다른의미에서)편향된 주장인 셈이다. 


오늘의 기술의 진전은 보다 더 큰 흐름을 따르고 있다. 이 흐름은 인류의 오래된 욕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욕망의 실체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한편 실체에 대한 접근은 자주 실체를 왜곡시킨다. 마치 광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한번 에 파악할 수 없듯이, 대상은 포획하려는 시도로부터 항상 빗겨나 있다. 정밀한 언어는 언제나 틀리다. 언어가 정밀 할수록 실체는 왜곡되기 마련이다. 특히 욕망은 직접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회 경로를 통해야만 한다.  


예술과 신화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감각적이고 가능한 굴절없이 드러내보이는 통로이다. 본고에서는 신화에서 드러난 인간의 포스트휴먼에 대한 욕망을 알아볼 것이다. 포스트휴먼이 새로운 종으로의 도약을 의미한다면, 이는 인간의 불가항적인 조건, 즉 예속을 벗어나려는 시도것이다. 다음 신화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근본 조건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관찰된다. 


영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난 길가매쉬, 자유로운 비상을 꿈꾼 이카루스는 인간의 예속된 상황에 대한 극복과 좌절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신화는 예속이 결코 억압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예속은 자유에 대적하는 개념으로 수동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예속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인간은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항상 예속된 존재였다. 따라서 자유를 쟁취하는 자는 그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 받으며, 나아가 깨달은 자라 칭송 받기도 하였다. 


선현들이 인간의 정신적인 자유를 실험하였다면, 오늘날 포스트휴먼은 물질적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 물질적인 예속은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 유기체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위 신화들의 인물들이 자연의 피할 수 없는 ‘포악질’ 로부터 상상적 도약 혹은 도피의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하다. 포스트 휴먼의 기술적 가능 조건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GNR(유전공학Genetics, 나노기술Nano-Tech, 로봇공학Robotics)기술은 이러한 욕망과 함께 진동하지만 다른 결을 갖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경향은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선 신화와 같이 같은 욕망을 공유하는 듯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선 다른 접근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기술은 생명 유기체의 작동 방식을 낱낱이 파악하고 이를 실제와 거의 유사 하게 모방할 수 있다. 


오늘날 생명 유기체에 대한 정의는 사이버네틱스 개념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생명 유기체는 무질서함을 유지하려는 자연 경향을 국지적으로 전환시켜 질서를 만들어 내는 장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술이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의 흐름을 인위적 으로 통제해 유의미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사이버네틱스에 내재된 본질적인 욕망은 통제(統制)와 관련이 있다. 이는 무질서한 자연의 엔트로피에서 질서를 창조하고자 하는 신적인 욕망과 다르지 않다. 이는 이성에 의한 완벽한 통제, 로고스(logos)에 의한 통치, 즉, 신이 이르고자 한 인류의 오랜 여정의 말로인 셈이다.  


하지만 환희는 잠시. 신체 세포들은 실리콘과 같은 신소재들에 의해 대체되고, 지적 판단 역시 인공지능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술적 결과들에 의존 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통제마저도 지시(指示)의 형태로 행하게 될지 모를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통제권을 잃은 우리는 새로 등장할 신을 모시며 살게될까? 미래에 출현할 신은 과거의 신과는 다른 신일까? 


들뢰즈는 “우리는 더 이상 유폐된 채 작동하는 통제사회가 아닌, 순간적인 커뮤니케이 션과 지속적인 통제로 작동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고 말한다. 이는 새로운 통제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이는 일자에 의해 행해지는 규율-통제 사회가 아니라 통제의 주체가 사라진 느껴지지 않는사회를 의미한다. 


과거의 통제는 통일된 원리로서 삶을 지배했었지만,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그 실체가 묘현하며, 순간 순간마다 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언뜻 자율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율이란 불가 능한 명제다. 들뢰즈의 진단은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예속의 시기로 진입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예속은 우리의 역사와 늘 함께였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 역사의 방향을 자연선택에서 지적설계로의 이행으로 보았다. 호모파베르 이전에 호모사피엔스인 이유는 무질서한 자연의 흐름 가운데 지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류sorting는 본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한편 발견된 질서는 예속으로 작용한다. 예속은 질서로 편입하려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속은 인류에게 문명과 안정을 안겼지만, 강한 질서로 자리 잡은 문명은 절대악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문명의 절대 악은 인간 개개인이 저지르는 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문명이라고 불리는 예속에 의해 자행된 - 한나 아렌트 식으로 표현하면,  악의 평범성에서 비롯된 -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속을 행할 수 있었기에 주인일 수 있었고 예속되었기에 노예였음을 깨닫게 된다. 


한편, 예술가들은 일찍이 이러한 사회 변화를 감지를 하고 기술의 성과들을 예술을 위 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백남준은 전 생애에 걸쳐 적극적으로 기술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을 꿈 꾼, 는 그의 탁월한 선견지명을 보여준다. 백남준의 선언문 , '1965'에 는 당대 사회를 진단과 실천이 등장한다. 백남준은 “사이버네티드화된 삶을 위한 예술” 을 제창하며 오늘날 “사이버화로 좌절된” 현실은 “사이버화된 충격과 카타르시스”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백남준의 당대 사회의 진단은 들뢰즈의 통제 사회에 대한 진단과 맥락을 같이한다. 백남준은 사회가 통제 사회로 이행하고 있음을 지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으로 ‘사이버화된 충격과 카타르시스’ 즉, 기술의 예술적 사용을 제안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의 예술적 사용은 문명의 강한 질서 지우기에 의한 기술 사용에 저항하는 의미로 인위적 통제가 아닌 욕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능케 하는 장치로 역할한다. 이는 자연의 엔트로피 경향, 즉 질서를 해체하는 경향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기술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을 이야기 하는 예 술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00_포스트 휴먼은 위한 애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