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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Aug 09. 2023

#002_포스트 휴먼을 위한 애도

방향 설정

아쉬운 이야기이지만 본고와 관련된 주제를 모두 해독해 내기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 하였고 필자의 지식도 박하였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내용 구성을 포기하였다. 정돈되지 못한 자료들에 대한 개별 해석이 주를 이룰 것이다. 각 장이 연결되지 못한 인상을 받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필자 역시 절감하고 있는 부분이 며, 향후 수정본에서는 더 숙성된 생각을 거쳐 좀 더 매끄럽게 다듬어낼 것이다. 따라서 다음 제시할 구성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임을 미리 선언하는 바이다.


본고의 개괄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본고에서는 먼저 포스트휴먼이 등장하게 된 기술적, 상상(신화)적,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물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추동(推動)하게 하는 원리에 대한 가설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나름의 진단을 내려볼 것이다. 미리 언급하자면 그에 대한 대답은 ‘질서, 패턴을 이루려는 (본성적)끌림’과 ‘통제에 대한 열망’으로 정리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 포스트휴먼이라고 하는 것의 정의를 묻고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백남준의 ‘사이버네티드화된 삶을 위한 예술’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먼저 첫번째 장에서는 포스트 휴먼과 구분된 전통적 의미의 인간 개념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이는 철학자 백종현의 학술지 「인간 개념의 혼란과 포스트휴머니즘 문제」(2015)을 주로 참고하여 작성하 였다. 더불어 창세신화에 대한 설명으로 성서의 내용과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신화에 대한 참고가 따를 예정이다. 인간의 개념에 대한 백종현의 구분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를 가진 생명체이지만 인간은 여타 짐승과 구분되는 특징은 이성의 자발적인 사용과 의지를 표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간의 특징은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존재, 즉 예속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존재의 출현을 예비한다. 


두번째 장에서는 포스트휴먼적 신화와 관련된 서사 독해와 이미지 분석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포스트휴먼적’이란 용어는 새로운 인간종을 지향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도전 의지로써,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인 죽음과 관련된 길가매쉬 서사시와 인간의 자유를 위한 도약과 실패를 그려낸 이카루스의 신화를 그 예로 들 것이다. 이러한 신화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은 인간의 예속 조건에 대한 타파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피터 브뤼겔의 이카루스에서는 이카루스의 비행이 매우 진 취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성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와 반대된 무관심과 권태의 인간 군상을 이카루스와 대비되는 인물로 읽어 낼것이다. 이들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 군상으 로, 필연적으로 행할 수 밖에 없는 생존 활동에 예속된 존재는 노예적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기대어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 가운데 필자가 주목한 것은 이카루스의 추락과 또다른 대비를 이루는 화면에 등장한 작은 새이다. 


이 새는 이카루스가 극복하지 못한 물질 적 자유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정신적 예속을 벗어나 물질적 예속으로부터도 벗어나려는 시도를 거듭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다. 


세번째 장에서는 이러한 물질적 예속으로부터의 벗어나려는 시도가 바로 오늘날의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정신에서 물질로 가치의 우위가 뒤바뀌는 근대-현대의 주목할만한 변화를 살펴 볼 것이다. 먼저는 포스트휴먼의 기술적 가능조건들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필자는 포스트 휴먼의 과학 기술적 조건으로서 논의 주된 무대를 NASA의 1993년 심포지움 VISION21에서 기고된 빈지 버너(Vinge Vernor)의 학술 논문과 특이점주의자 레이커즈와일이 제시 한 GNR기술에서 찾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논의들이 가능해진 배경으로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개념과의 연결고리를 찾아 볼 예정이다. 


사이버네틱스는 자연과학의 코페르니쿠스 적 전환이라 부를 수 있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기대고 있으며, 미국의 수학자 기브스에서 아이디어를 빚지고 있는 개념이다. 자연의 경향은 무질서를 지향하지만 생명 유기체는 이러한 지 서를 국지적으로 역행하여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장치이다. 따라서 사이버네틱스는 이러한 생명 유기체를 자연의 포텐셜 에너지의 의미있는 사용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배경으로 몇가지 개념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 첫번째는 엔트로피와 확률, 즉 세계의 무질서 경향 혹은 복잡화 경향에 대한 이해를 먼저 언급하고, 두번재로 생명체의 질서 만들기 방식으로 고정성과 학습을 통해 자연의 변화 무쌍한 계를 적응하는 모델을 수립한다.  마지막으로 이를 실현할 개념적 틀로 물질의 정보화를 주장한다. 이는 모든 것은 정보로 치환될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의 물질작용과 심지어 정신 자극은 이러한 정보의 오고간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이를 기계와 인간의 결합의 가능 조건으로 이해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통제 방식이 자연을 모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인간의 의도와 의지, 이성에 의한 통제다. 이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통제와는 결이 다르다. 따라서 인위적인 통제의 기술이 가져 올 오늘의 고통과 좌절은 이러한 (허술하고) 작위적인 방식에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네번째장에서는 백남준의 산문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백남준은 일찍이 플럭서스 활동간 존 케이지(John Cage)의 실험적 음악에 매료되어 있다가 넥타이를 자름으로 그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별은 상징적인 것이었다. 이는 백남준의 행보 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듦을 의미했다. 백남준은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음극관 예술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가 남긴 산문들을 통해서 그가 지향하고자 했던 예술의 특징은는 사이버네틱스로 초래된 작위적인 흐름의 통제에 대한 극복하기 위해 사이버테틱스적 장치를 적극 활용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 이버네틱스의 주요 개념으로는 1)’사이버네티드된 삶’, 2)’파르마콘(Pharmakon)’, 3) 약함 이 강함을 이기는 구조, 4)열린 회로 등이 있다. 이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백남준의 사이버화 된 삶에 대한 걱정은 기술에 의한 부자연스러운 소통과 통제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백남준은 이러한 통제 장치를 좀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가장 쉽게 대중들에게 알리려 했으며, 이러 한 기술의 민주적이고 적극적인 활용이 곧, 기술의 기술적 사용이 아닌 치료책으로서 ‘사이버 네티드화된 삶을 위한 예술’ 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백남준의 이러한 기획은 노자의 ‘무위의 통치’와 매우 닮아 있다. 무위의 통치는 어떠한 의지의 개입도 어떠한 목적에 귀속되어 실행되지 않는다. 단지 포텐셜 에너지들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이들이 서로 만나 분절과 이접을 거치는 것을 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백남준의 사이버네트화딘 삶의 예술은 기술의 예술적 사용을 말하고 있다.  결론에서 우리는 앞선 논의들을 종합하고자 한다. 


먼저 전통적인 인간 관게에 대한 이해를 거쳐 오늘날 포스트휴먼적 논의가 신화에서도 여전히 드러나고 있음을 다시한번 역설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 포스트휴먼의 기술적 배경이 되는 개념으로 ‘특이점’과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오늘날 기술의 태도가 기존의 자유로운 인간 주체를 해체시키고 물질과 정보의 집합체로서 이해하게 됨에 따라 정신이 말소되었며, 물질의 작용마저도 근본적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와중, 정보의 출현이 여러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이질적인 요소들의 접합을 꿈꾸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본래 더 많은 주제와 더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시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를 반에 반도 따라 가지못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실망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물론 본 연구자의 역 량의 부족이 가장 크겠지만, 자료의 방대함, 또한 미래 혹은 현재 진행중은 사후평가에 대한 비평이 기댈 곳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끝까지 몰고 가는 이유는 이 주제에 이번 연구(탐구)는 매우 초보적이고 어쩌면 오류투성이의 쓰레기 같은 길일 수도 있지만, 모든 처음은 미숙하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직관적 해석에 대해 한가지만 덧붙이려 한다. 이글의 부제가 왜 ‘호모 데우스를 위한 애도’인지에 관해서이다. 호모 데우스는 앞서 말한바, 인간의 지적 설계 능력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모두 꿰뚫고 이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연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따라서 포스트 휴먼은 기획-주체로 이해된다. 기획-주체는 모든 것을 가능한 영역으로 바꾸려는 주체이다. 이러한 환상은 오늘날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도약으로 부터 자신감을 얻는다. 하지만 어떠한 외부적 조건도 인간의 예속을 막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속안에 갇힌, 호모 데우스의 기획의 실패를 미리 예견하고 이에 애도를 표할 것이다 애도는 애도 주체의 성숙을 이끈다. 이는 실패, 상실에 대한 감정이 반드시 부정적인 쇠락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유연하고 단단한 주체의 형성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전달하지 않은 메시지는 전달하는 메시지와 동일하게 중요하다.” 라고 말했던노버트 위너의 수수께끼 같은 문장은 커뮤니케이션 사이에서 벌어진 지나친 아웃풋을 의미한다. 이는 때로 젠체하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핫 미디어적 성격의 장치는 최소한의 정보를 효율적의 전달한다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 제시한 구성을 따라 과연 우리는 사이버화된 통제 사회에 대해 나는 무 엇을 알 수 있고,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며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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