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적 서사 구조 _인간의 필사성(必死性)과 삶의 완결성 관계
인간의 필사성(必死性)과 삶의 완결성 관계
변증적 서사 구조
길가메쉬의 이야기는 자연과 문명에 대한 이야기로 죽음과 영원에 대한 변증적 서사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를 서사의 전개를 따라 ‘힘의 추구’ - ‘대립’ - ‘결합과 도취’ - ‘상실감’ - ‘죽음’ - ‘각성’ - ‘영원’ - ‘불능’ - ‘불로’ - ‘상실’ - ‘완결’ - ‘불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엔피두와 길가메쉬의 첫 만남은 문명과 자연 대립을 의미한다. 길가메시와 엔피두는 모두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선 동일하지만, 길가메시는 “모든 것을 다 본, 경험한” 통치자로, ‘앎’과 ‘지배’를 통해 힘을 추동시키는 반면, 엔피두는 “사람과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 이 없지만 “물과 짐승을 좋아”하는 ‘무지(無知)’와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여기서 무지란 문명의 ‘앎’과 대비되는 자연의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엔피두는 창녀(혹은 여사제)와의 사랑을 ‘알게됨’으로 그 순수성을 박탈 당하고 문명의 주술에 걸려 들게 된다.
엔피두는 부분적으로 힘을 잃고 문명의 안으로 들어오지만 여전히 그 강대한 힘은 길가메쉬를 압도한다. 아무리 강성한 문명이라 할지라도 자연의 극복할 수 없는 힘 앞에선 굴복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한다.
길가메쉬의 패배로 싸움은 종결되었지만, 엔피두는 길가메쉬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자연은 문명을 굴복시키거나 좌절시키지 않고 의기투합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엔피두가 이후 문명에서의 생활에서 병을 얻은 것 처럼, 문명에 복속된 자연은 제 힘을 발휘 하지 못하고 생동감을 상실한다. 길가메쉬가 엔피두에게 여정을 제안한 것은 엔피두에 내재한 무한한 힘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한다. 이후는 앞서 보았듯, 어떤 두려운 대상(후와와, 천상의 황소)도 그들을 막아 설 수 없었으며, 세계의 질서(신들)마저도 능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거칠 것 없는 시기였다. 하지만 단 하나, 죽음 만은 극복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연의 힘을 빌어 자연을 개척해온 인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는 자연과 인간(문명)이 구분되거나 각을 세우는 대립 쌍이 아니라, 서로 상보적인 협력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과 인간의 협력은 여러 난관을 극복하며 무한에 가까운 힘의 팽창을 야기시켰다. 이는 눈 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정복을 위한 힘에의 도취였다. 도취에는 가능함의 긍정만이 존재한다. 이 도취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긍정은 죽음이라는 극복할 수 없는 부정성 즉, 긍정의 절대 불가능(不可能)을 의미하는 절대 부정에 의해 부정당한다.
죽음 현상은 죽음 개념에 앞서 있다. 죽음의 개념은 상실감 이후에 비로소 파악된다.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상실감이 죽음을 개념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엔피두의 죽음이 길가메쉬의 상실감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길가메쉬의 상실감이 엔피두의 죽음을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지금부터 서사의 흐름은 부정의 변증법을 따라 전개된다.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아니라 여전히 부정의 상태인 아포리아의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즉, 부정의 출현(상실, 있던것이 없어짐)이 각성의 조건이 되어 개념(죽음)을 형성하고, 다시 이에 대한 부정 개념(영원)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긍정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태생적인 부정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는 관념적 논리에 국한된 변증법이 아니라 연속된 부정의 출현을 야기하는 실재와 관련된 변증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즉, 죽음 개념에 대한 부정으로 등장한 영원 개념은 필연적으로 부정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등장한 개념인 셈이다.
때문에, 자연과 인간(문명)의 의기투합은 여기서 끝난다. 자연에는 죽음 개념 즉, ‘없어짐’의 절대-부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엔피두의 죽음 이후, 길가메쉬는 해답을 찾기 위해, 홀로 여정을 떠난다. 이는 자연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문명의 탐색이 라는 상징적 해석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때의 길가메쉬는 더이상 역동적인 힘을 과시 했던 과거의 길가메쉬가 아니다. 그는 죽음의 개념에 사로잡혀 영원 개념을 긍정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답을 찾아 방황하는 길가메쉬다. 하지만 우트나피쉬팀과의 만남은 영원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우트나피쉬팀은 죽음이 잠과 같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말하는데 이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절대 부정인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우트날피쉬팀은 불로(不老)에 대한 가능성(可能性)을 이야기한다. 불로의 개념은 죽음에 대한 대안 부정으로 기능한다. 늙는다는 것은 ‘있음’의 상태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늙지 않는 불로의 개념은 ‘있음’의 상태 변화에 대한 부정이지 죽음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이는 앞서, 말한 영원의 ‘있음’의 ‘있음’ 개념과는 다른 데, 불로는 ‘있음’에 ‘있음’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뱀에게 불로초를 빼앗긴 길가메쉬는 이 가능성(可能性)마저 상실(부정 당)해버린다. 하지만 여기서의 상실은 영원성의 상실과는 질적을 다르다. 영원 개념의 부정은 불가능(不可能)한 부정이라면, 불로의 개념은 가능(可能)한 부정이다. 즉, 길가매쉬 이야기는 불로에 대해서 만큼은 가능(可能)한 것이라는 여지를 남겨둔다.
하지만 길가매쉬는 불로(不老) 가능성(可能性)에 대한 기회를 박탈 당함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각성은 죽음의 절대 부정에 대한 긍정으로 가능(可能)해진다. 즉, 인간의 필사성(必死性)을 받아들임으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삶의 완결'이라는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데, 삶의 완결은 죽음의 가능 조건으로서의 상실감인 ‘있음’의 ‘없어짐’에 ‘있엇음’을 더하여 ‘있음’의 ‘없어짐’이 ‘있었음’ 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낸다. 이는 죽음 개념의 ‘없어짐’이라는 절대 부정(긍정의 절대 불가능)에 대한 부분 긍정(시인是認)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삶의 완결 공식은 “세상은 하나의 여인숙이며 죽음은 여행의 끝이다.”라는 길가메쉬의 고백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예비된 종결 형식(죽음 개념)의해, ‘있었음’ 을 통해서만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간의 필사성(必死性)을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방법에 대한 존재론적 고뇌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길가매쉬 이야기는 죽음이 자연의 내재한 필연성이며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이러한 숙명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길가매쉬의 죽음에 대한 여정을 통해 우리는 세가지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영원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며, 불로는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 가능성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결국 인간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완결성을 수용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결론 지어진다. 물론 우리는 죽음의 조건인 상실감을 거부함으로써 제3의 길을 걸을 수도 있겠지만, 길가매쉬를 통해 인류가 품은 죽음과 영생에 대한 오래된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길가매쉬가 제시한 세가지 방법 중 하나가 오늘날 발전된 과학 기술로 인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길가매쉬 이야기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영생, 영원, 불사, 불로
우리는 갈가매쉬의 이야기에서 영생과 불로에 대한 구분을 얻게된다. 영생은 불사와 영원성과 관련이 있는 반면 불로는 늙지 않는 젊음과 연관이 있다. 불사는 존재의 시간과 공간의 한 차원에서의 항구불변을 의미한다. 즉, 현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이야기 한다. 반면 영원은 내세라는 차원을 포괄한다. 따라서 영원성은 종교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종교는 현세와 내세의 시공간 축들을 인정함으로 존재의 있음을 보장한다. 한편 또 다른 종교에서 영원의 개념은 내세를 포괄하지 않고도 설명 될 수 있다. 이때의 영원은 다른 차원을 상정하거나 도약할 필요 없이, 존재의 변화, 즉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의 이행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한편, 길가매쉬의 말하는 영생의 개념은 불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내세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는 길가매쉬 신화가 여타 신화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 현세에 대한 강한 집착과 내세를 상정하지 않는 결말. 길가매쉬 서사는 현세에서 불사하는 존재의 불가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면, 불로는 긍정한다. 불사와 불로는 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불사는 죽음에 대한 부정이다. 즉 늙음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불사는 도가에서 백발의 노인으로 그려진 도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한편, 불로는 늙지 않음 즉, 젊음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죽음은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불사나 불로는 둘중 하나의 상위의 개념이 아니다. 한편, 길가매쉬 서사에서 불로에 대한 긍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영원한 젊음이라는 테마는 활동적인 삶에 대한 예찬과 관련이 있다. 젊음의 활동은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식물의 주기로 예를 들면, 젊음은 햇빛과 양분을 한껏 빨아들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생산 과정을 의미하다. 반면 늙음은 모든 생명 활동을 끝마치고 시들어 양분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젊음에 대한 무한 긍정인 불로는 끊임없이 양분을 흡수하고 끊임없이 열매를 맺으려는 태도를 갖고 있다. 길가매쉬 신화는 영원한 생산 활동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가능의 기회를 놓친 길가매쉬는 한정된 삶에서의 생산을 긍정하며, 부국 건설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