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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Aug 12. 2023

#009_이카루스 신화_피터브뤼겔 <이카루스의 추락>

노동하는 인간 군상의 변화

3.2 이카루스 신화 - 피터 브뤼겔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3.2.1 화면 구성 및 일상 장면 


 이카루스 신화는 비범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카루스 신화는 <다이달로스(Daedalus) 신화>라고 불려 지기도 하는데, 이는 이카루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비행 이야기와 동일한 ‘신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카루스 신화는 당대에 가장 사랑받는 이야기 중 하나였다. 여러 시대를 거쳐 예술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시켰고 신화와 관련된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이카루스 신화는 각색하는 바에 따라 내용이 크게 달라졌지만, 큰 골격은 동일히다. 대략적인 흐름은 다음과 같다. 


 이카루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잘못으로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에 감금되었고, 다이달로스가 만든 날개를 달고 달아나다 추락해 죽었다는 내용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용기있는 도전으로 보여질 수도 있고, 무모한 인간의 허영과 욕망으로 초래된 비극으로 읽히기도 한다. 


 본 절에서는 다소 확정적인 내러티브의 문학 작품 대신 보다 열린 내러티브 구조로서 이미지를 경유하고자 한다. 특히 다루어질 작품은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Peter Brueghel,1525/30 ~ 69)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으로, 이를 통해 이카루스 신화가 갖는 의미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브뤼겔은 상징적인 주제나 시대적 상황을 자신의 윤리의식과 예술관에 결부시켜 그림을 그렸다. 그의 표현 방식은 이중적인 개념을 제시해 윤리적인 교훈을 담아내고자 한다. - 그의 작품은 선과 악 혹은 미와 추을 대립시켜 다분히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도판1. 피터 브뤼겔 Peiter Brughel,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



화면 구성 


  브뤼겔의 본 작품,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0000)은 표면적으로는 포근한 느낌의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이질적인 장면이 삽입되어 있어 관람자의 상상을 자극시킨다. 화면의 근경에는 말을 이용해 경작하는 농부가 등장하며, 중경에는 양치기, 범선(무역선), 추락한 이카루스의 다리와 흩날리는 날개 그리고 무언갈 낚고 있는 남자가 등장한다. 원경에는 무역 항구가 있는 마을(상상적인 마을)과 배들이 있고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떠 있다. 화면을 다시, 두개의 사선을 그어 분할해보면 오른쪽에는 경작하는 말이 있고, 아래쪽에는 경작하는 농부와 양치는 목자 그리고 무언갈 낚고 있는 남자가 있으며, 왼쪽에는 범선과 이카루스가, 위쪽에는 항구마을과 태양이 그려져 있다. (편의상 화면 구성을 1~4번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구성은 원근법의 소실점이 위치한 화면의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순차적으로 시선을 이끈다. 1번의 화면에 등장한 말은 2번 화면의 경작하는 농부의 등장으로, 농부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양치기와 개, 양의 관계도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오른쪽 화면에서는 막 추락한 이카루스의 다리와 이카루스와 흩날리는 날개가 표현되어 있다. 범선은 이카루스의 추락에 무심한 듯 유유히 항해를 계속한다. 이러한 무관심은 바로 앞에서 벌어진 추락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낚는 사람에게서도 발견된다. 이카루스의 추락은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으며 인물들은 각자 자신들의 할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또한 (상상의)마을과 유유히 떠다니는 배, 그리고 공기 원근법으로 표현된 빛의 표현은 아무일도 없는 평화로운 일상적 분위기를 전달 한다.  


일상 장면 - 노동(labor)하는 인간 군상

   경작하는 농부, 양치는 목동, 낚시하는 사람, 범선과 같은 소재는 당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조금 주의를 기울여보면, 이들 소재가 노동(labor)하는 인간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다. 또한 이들 노동하는 인간 군상이 자유 비행을 꿈꾼 이카루스와 완벽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는 것 역시도 알 수 있다. 브뤼겔의 본 작품에서의 노동하는 인간의 의미는 고대 그리스의 노동에 대한 정의를 따른다.


오늘날과 같이 노동을 신성시하는 태도는 근대기 이후가 되어서야 형성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하는 존재들에 대해  ‘자신의 신체로 삶의 필연성에 봉사하는 노예나 길들여진 동물’ 이라고 폄훼하며 노동을 ‘신체가 가장 많이 소모되는’ 가장 천한 일이라 여겼다. 이는 ‘필요에 의해 필연적으로 수행하는 신체의 노동은 노예적이다’ 라는 명제 하에, 노동을 노예의 행위로 정의내린 것이다. - 이러한 노동에 대한 경멸은 당시 그리스의 노예제의 성립 조건이기도 하였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자발적인 것에 대비되는 필연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대비되는 신체적인 것에 대한 구분으로 가능하였다. 필연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은 이상적인 인간 상에 부합하지 못하다고 본 것이었다. 

  한편 양치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치기의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인간의 삶에 방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게으른 삶이 양치기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labor)을 하지 않고서도 가축으로부터 식량을 획득하고 여가(skholazousin)을 즐기기 때문이다.” 양치기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브뤼겔의 본 작품에서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브뤼겔의 본 작품에 등장하는 양치기는 밭을 갈기 위해 쟁기에 몰두하는 농부와 달리 시선을 공중에 두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양치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농부의 삶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양치기의 삶은 여가적인 삶의 형태는 될 수 있겠지만, 노동으로 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동은 위와 같은 의미 외에도 세계를 사물화하고 소비하는 활동으로 여겨기도 한다. 즉, 노동은 생존을 위한 소비재로서 세계를 사물화하는 것을 말한다. 양치기의 삶은 자신의 신체를 직접 사용하진 않지만, 개를 이용해 양떼를 치고 양으로부터 식량을 획득한다. 다시 말해, 개를 도구화하여 개의 노동으로 양떼를 통제하고 양에게서 소비재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 소비의 목적이 생존을 위한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양치기의 삶 역시 노동의 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농부의 노동과 양치기의 노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농부의 도구는 말과 쟁기이다. 말은 밭을 갈기 위한 동력을 제공해주는 한편, 말은 자신의 활동에 대한 자각이 없다. 때문에 말을 이용해 밭을 갈기 위해서는 말의 동력을 밭을 가는 용도로 탈바꿈 시켜주는 도구인 쟁기가 필요하며, 이를 시시각각 컨트롤해야 하는 농부의 신체적 활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농부에게 있어 세계를 소비(밭을 갈아 식량을 얻는 것)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소비 활동에 자신의 신체를 내맡겨야만 한다. 그러나 양치기의 경우는 개를 이용해 양을 관리하는 활동의 상당 부분 개에게 위임함으로써 소비재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러한 양치기의 노동에서 양치기의 여가적인 삶의 가능 조건을 이해하게 된다. 노동을 통해 소비재를 만드는 과정에서 노동-주체의 개입이 적어지면 적어질 수록 노동-주체는 노동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며 이로써-얻을 수 있는 결과로써-여가의 삶이 주어진다. 하지만 여가는 노동의 대칭된 쌍으로 휴식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여가란 노동과 노동의 막간으로 자리한다. 양치기의 여가는 이카루스의 비행과는 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말이다. 이카루스는 태양을 향해 돌진 했지만 양치기는 태양을 등지고 서 있다. 태양은-모든 것을 밝히는- 절대 이성의 상징이다. 태양과 등진 양치기의 모습에서 양치기의 여가적인 삶은 진리에 대한 탐구 활동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선 논의를 통해, 간략하게나마, 노동하는 인간 군상들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이를 통해 노동하는 인간과 이카루스의 대비가 정신성-신체성, 자발성-필연성으로 대립된 두 도식을 그 근거로 성립함을 알아보았다. 이제 이카루스에 대한 해석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카루스와 관련된 일화 중,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들었음에도 이카루스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 볼 수 있다. 다이달로스의 충고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 밀랍으로 된 날개가 태양 열기에 녹으리라는 추측은 합리적이다. - 이카루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충고를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카루스는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이카루스 이야기가 오만과 허영으로 읽혀지는 이유 중 하나는 객관적인 현상 마저도 자신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즉 진리에 대한 무모한 도전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 정말 이카루스는 태양의 열기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는 자신이 추락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생존보다 더 절실한, 노동의 삶과 구분된 또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카루스의 비행이 갖는 의미는 앞서 노예적 활동인 노동과 대비되는 주인의 주권에  대한 것이다. 유명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르면, 주인과 노예의 싸움에서 주인은 자신의 주권을 위해 죽음을 불사할 용기를 가졌지만, 노예는 자신의 벌거벗은 삶을 걱정했기 때문에 노예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카루스의 태양을 향한 무모한 돌진은 자신의 자유 의지의 실현, 즉 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용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브뤼겔의 작품에 등장한 이카루스의 주권 실현을 위한 도전은 노예적 삶을 사는 노동하는 인간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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