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루스적 인간의 종말
무관심과 권태에 빠진 인간 비극성
브뤼겔의 본 작품은 이카루스의 정신적인 숭고함을 예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카루스는 그저 추락하는 풍경으로써 그려져 있을 뿐이다. 브뤼겔은 그보다는 이카루스의 추락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노동하는 인간의 비극성과 권태에 대해 이야기 하려 했다. 현대시인 오든(W.H.Auden)은 브뤼겔의 본 작품에 대한 감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브뤼겔의 이카루스를 예로 들자, 모든 것들이 얼마나 여유 있게 그 재난을 외면하고 있는가. 밭가는 이는 풍덩 소리와 그 버려진 비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밭가는 이에게 그 실상은 중요하지 않다. 태양은 빛났으니까. 태양은 초록색 물 속으로 사라지는 하얀 다리를, 이제까지 그랬듯이 비춰주고 있다. 그리고 한 소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저 값 비싸고 정교한 배는 목적지로 가야 했기 때문에 조용히 항해를 계속했다.”
일상의 군중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과 노동의 휴식으로 주어진 여가 외의 모든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오로지 벌거벗은 삶을 연명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앞서 포텐셜 에너지를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장치에 대해 이야기 해보았다. 본 작품에서 가장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포텐셜 에너지를 특수한 목적에 따라 재단하는 것은 말을 통해 드러난다. 즉 경작하는 기계로서 말의 동력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적용이 노동하는 인간 군상에도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브뤼겔의 작품에 등장한 노동하는 이들은 감각 기관은 말소되고 오로지 노동하기 위해 신체의 포텐셜 에너지를 쓰는 존재들이다.
- 그렇기에 그들은 이카루스의 날아오름을 볼 수도, 이카루스가 추락하며 지른 비명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들을 노동하는 기계로 가능케 한 조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노동에 얽매인 노예의 삶은 주인의 주권인 향유의 삶을 알지 못한다. 주인의 주권은 생존을 위한 삶의 형태를 넘어선 죽음마저도 감수한다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노동하는 인간 군상들은 이카루스의 그와 같은 주인의 주권에 대해 이해 할 수 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즉, 노동하는 인간 군상은 자신의 포텐셜 에너지의 주권적인 활용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의 무관심과 권태의 원인은 자신의 포텐셜 에너지를 누군가에 의해 혹은 어떤 시스템에 의해 착취 당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포획틀 안에서 이들은 포텐셜 에너지의 주권적으로 행한 이카루스를 발견 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