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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Aug 12. 2023

#011_이카루스 신화_탈 예속의 실패 그리고 가능성

가능성

물리적 예속 


  예속을 벗어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선 이카루스가 아버지의 충고를 어겼듯 예속의 고리를 파기해야한다. 또한 예속을 벗어나기 위해선 이를 실현 시킬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하다. 이카루스의 경우에는 그것이 날개였다. 그는 미궁과 자신을 대지에 붙잡는 중력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체를 변환하고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카루스의 자유의 말로는 추락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속을 벗어나지말라는 새로운 명령일까? 아니면 우리는 예속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카루스의 비행은 자유에의 도전일 수는 있지만, 자유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태양의 열기와 밀랍 날개, 바다라는 자유를 속박시키는 조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카루스가 있는 배경에 그려져 있는 작은 새들이다. 새는 이카루스의 비행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또 이카루스는 추락하며 새를 발견했을까? 우리는 노동하는 인간의 예속과 이카루스의 자유를 구분하였다. 하지만 새의 등장으로 이러한 예속과 자유의 선이 희미해짐을 느끼게 된다. 무엇을 예속이라 부르고 무엇을 자유라 부를텐가?


  우리는 또다른 예속의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이카루스의 추락이 의미하는 바는 정신적 자유, 즉 주인 주권을 넘어선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는 물리적 조건의 예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속은 질적으로 다른 예속을 다가온다. 이는 정신적 고양만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조건을 의미한다. 앞서 길가매쉬에게 있어 죽음과 같이 이카루스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자연 조건이 있엇던 것이다. 이카루스의 비행은 인간 신체 조건의 극복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는 물질적 예속을 단기간 벗어난 것이다. 이카루스는 새가 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브뤼겔의 작품에서 기술의 또 다른 의미를 읽어 낼 수 있다. 이는 기술이 농부의 쟁기나 범선과 같이 노동을 돕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카루스의 날개와 같이 이상 즉, 자유를 위해 물질적 예속을 극복하도록 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이카루스는 새가 될 수는 없었지만, 오늘의 인류는 비행기를 만들어냈고, 비행 슈트를 개발했고, 심지어 새와 같이 기능하는 날개를 달 수도 있는 기술적 비약을 이루어 내었다. 이 기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는 어쩌면 정신적 예속을 너머 물질적 예속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것일 지도 모른다. 


탈-예속의 실패와 가능성

 

 탈 예속의 실패  

  기술과 예술은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술은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하였던 반면 기술은 물질적 자유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일 수 있다. 우리는 예술과 기술을 추동시키는 근원적인 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한편, 이러한 추동하는 힘을 포획해 이용하는 장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기술의 발전은 노동과 관련해 생산과 소비에 일조하였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기술은 대지를 탈 은폐 시킴으로 소비 가능한 재화로 만들어내는 데 탁월했다. 그렇기에 기술과 노동의 역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예술은 세계가 세계로서 드러나는 길을 찾으려 노력했으며, 이는 세계를 소비재로서가 아닌 감상과 사유의 대상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또한 우리는 불로와 강화된 신체에 대한 열망이 어떻게 신화적 상상과 기술적 상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불로는 오래된 인류의 염원 중 하나로, 젊음을 지속시켜 끊임없이 양분을 흡수하고 열매맺으려는 태도가 담겨져 있었다. 한편 이러한 젊음의 포텐셜 에너지를 포획해 동력으로 삼으려한 포획 장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브뤼겔의 작품에서 알아 보았듯이 포획 장치의 동력이 된 인간의 포텐셜 에너지의 활용 방식이 마치 경작하는 말이나 양 떼를 모는 개와 유사했다. 그와 대비되는 인물인 이카루스에게서 노동의 삶과 분리된 진리를 향한 포텐셜 에너지의 활용을 엿볼 수 있었다. 노동하는 존재로 포획된 인간은 예속된 상태에 머무르며 자신의 역할 외에는 무관심하였다. 또한 이카루스의 비행은 정신적인 자유만으로는 완벽한 자유에 이르지 못함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은 완벽한 자유를 실천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물리적 조건 안에서만 한정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신화에서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예속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시도하였지만 이들 서사는 좌절된 결말로 점철되어 있었다. 길가매쉬를 예속하는 것은 죽음이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이는 ‘모든 만물은 생로병사한다.’는 자연의 절대 진리 앞에 무너져 내렸다. 이카루스는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며 하늘 높이 날아 올랐지만 타는듯한 태양의 열기로 인해 그 비상이 좌절되었다. 물론 이들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취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예속의 원인은 자연의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가능성 

  그러나 이들 신화는 이러한 예속에 대해 좌절로 끝맺음하지 않았다. 이들은 예속을 억압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길가매쉬는 인간에 필사성을 긍정함으로 삶의 완결성을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그의 행위는 살아 있는 동안의 삶에 대한 긍정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또한 이카루스는 비록 추락했지만 그의 의지는 이미 실현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행위는 자발성에 근간하며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오롯이 자신이 떠 않고 있었다.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충고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 시켰다. 이는 이카루스의 인격의 완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에 대한 완벽한 이상을 선보여준 것이다. 


  한편 이들 신화가 남긴 것에는 또다른 것이 숨어 있다. 이는 정신적인 탈-예속의 시도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탈-예속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길가매쉬의 신화에서 불로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듯, 신체의 예속, 즉 늙음은 극복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는 불로초를 훔친 뱀이 허물을 벗듯이 늘 새로운 신체를 유지한다는 고대인들의 발견에서 비롯한 것일 테지만, 오늘날 기술이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를 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물질적 탈-예속의 한 단계를 건너가려는 지점에 서있게 된다. 


  또한 브뤼겔의 이카루스 작품에서 그려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새의 이미지는 이카루스의 비행이 단지 불가능은 아니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난다’라는 행위는 인간 신체에 한해서 불가능 한 것이었지, 새와 같은 신체를 지닌 동물들에게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의 탄생과 함께, 인간과 다른 신체를 지닌 생명체의 활동 방식에 관심을 갖게된 배경이 된다고 볼 수있다.


 즉,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그 작동 원리를 파악함으로 가능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근대의 과학의 발명은 이러한 관찰과 실험을 기조로 둔 새로운 학문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그렇기에 인간을 물리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장치로 작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과학적 방법론에도 양가적인 측면이 공존한다. 다음으로는 포스트휴먼적인 기술적 논의들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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