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휴먼의 기술적 논의
빈지의 ‘특이점’ 개념을 구체적인 기술에 접목하고 발전시킨 인물은 컴퓨터 과학자이자, 공학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Raymond Kurzweil이다. 그는 커즈와일 신디사이저를 개발하기도 한 발명가이기도 하며,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지지하는 자타칭 트랜스휴머니스트이자 특이점주의자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주저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2005)를 통해 유명세를 얻었는데, 본 저서에서 등장하는 커즈와일의 아이디어는 빈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커즈와일은 공학자이자 발명가로서 구체적인 기술 사례들을 활용했으며 최신의 기술 경향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막연한 추측을 넘어선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특히, 그의 아이디어의 특징적인 부분은 컴퓨터 성능 발전 속도를 추측에 기대어 주장한 빈지와는 달리 계산가능한 수식으로서 증명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커즈와일은 이러한 기술의 진화 이론을 ‘수확가속의 법칙’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앞서 밀리스가 말한 기술의 S곡선을 바탕에 두고 무어의 법칙을 따라 기술적 특이점의 시기를 예측한 것이었다. 그의 이론을 요약하자면, 생명체의 진화는 산술급수적으로 완만하게 이루어지는데 반해 기술의 발전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가파르게 증가하여 기계 지능이 인간 지능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계 지능이 인간의 지능과 같아지는 시점이 온다면 이미 기계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 해진다. 이는 마치 인간보다 하등한 지능을 가진 존재가 인간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듯이, 인간보다 상위 차원에 있는 기계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진화 곡선의 접점을 특이점이라 부르며, 이 시점 이후 인간과 기계의 격차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될거라 추정한다.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특이점을 향한 기술의 발전이 경제적 요구에 힘입어서 속도를 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거두려는 기업과 정부가 가만히 있을리 없다는 분석이다. 그의 분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뇌 과학의 눈부신 성과로 인해 혁신적인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에 주목한다. 인공지능 개발은 뇌에 대한 역분석을 통해 인간의 신경 시스템과 유사한 모델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뇌의 구조와 유사하게 작동하는 기계가 뇌에 접속하여 직접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시스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1993년 NASA 심포지움에 참석했던 한스 모라벡Hans Moravec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모라벡은 인간 정신현상을 정보의 패턴으로 환원할 수 있으며, 기계와 뇌의 연결을 주장하였다.
한편, 커즈와일은 이러한 시기를 앞 당길 요인으로 DNA에 대한 염기서열 분석(Genom)과 인터넷, 컴퓨터의 소형화를 꼽았다. 이는 기술적 특이점의 조건으로 GNR 기술 분야의 혁신적인 발전이 중첩된 시너지에 주목하게 한다. GNR은 유전학(Gentics), 나노기술(Nano-Tech), 로봇공학(Robotics)의 약칭으로 이전까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실험들이 기술의 도움에 힘입어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커즈와일은 물질을 대체한 정보의 기능이 생물에 대한 이해에 혁신을 가져왔고, 마이크로 단위의 통제를 의미하는 나노기술의 발전 덕분에 분자 단위의 설계가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배경에는 고도화된 컴퓨팅 기계가 있었으며, 생명체의 복잡한 유기 상호 작용을 인공지능을 통해 구현하고, 나아가 기계와 인간이 혼합된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리라 예측하였다.
새로운 종의 출현은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야기시킨다. 커즈와일은 새로운 종의 출현이 인체, 뇌, 수명, 전쟁, 학습, 노동, 놀이에 미칠 영향을 자신의 철학적 견해와 상상력을 더해 추정한다. 그가 예견한 과학 기술의 성과들은 기존 인류의 삶을 송두리 째 바꿔 버린다. 인간의 신체는 물질이 아닌 정보의 집합으로 이해되며 이들 작용은 이들간의 함수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죽음은 더이상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나 신비의 대상이 아닌 치료해야할 질병으로 분류된다. 전쟁 또한 인간끼리의 전투가 아닌 로봇에 의한 살육으로 양상이 변화하며, 학습 역시 정보를 송수신하는 교환 행위로 기능하게 된다. 로봇의 역할 수행 능력이 탁월해지면서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된다. 유일한 인간 활동 영역으로 여겨지는 놀이와 예술 역시 언젠가는 인공지능에게 양도할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커즈와일은 포스트휴먼이 갖는 본성적 변화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는 기술의 침투가 인간성 자체를 바꿔놓지는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포스트휴머니스트가 아닌 트랜스휴머니스트라고 정의한다. 커즈와일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가능한 질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인간 육체가 기계로 대체되고 사고 중추기관까지 기계화 한다면 인간의 정체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겠는가?
2) 기하급수적인 기술의 발전은 정확한 예측인가?
3)인간은 유전자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물리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 대단히 복잡한 존재가 아닌가와 같은 회의론적 질문에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