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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 정신(1)

주 1회 셀프청탁 에세이

by 기맹드

문학동네의 제16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소설 중 이희주 작가의 <최애의 아이>를 보고 나의 덕질 시절이 떠올랐다.


"아까울 거 하나 없는데 못 줄게 뭐람?
있는 거 없는 거 닥닥 긁어 주다 보면
다 준 것 같아도 또 차오르는 순간이 있었고
그럼 또 줬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하는 게 좋아서 계속 줬다. 어느 날엔 내가 이 사랑을 접는 게 죄가 되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주다가 그만두면 그 사람의 기둥이 무너지겠구나, 싶어 스스로가 무서워질 정도로 줬다."


소설 속 30대 미혼여성 우미는 20대 미남 아이돌인 유리를 덕질한다. 저자는 우미가 루키즘(lookism)이 권력화된 이 사회에서 자신보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유리를 사랑하고 간접 소유하는 방식으로써 유리의 '정자'를 공여받아 아이 낳는 판타지를 그려냈다.


저자는 아직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돌의 정자 공여'라는 제도를 대전제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지만, 덕질러가 덕질을 하는 이유와 진지한 태도, 덕질관에 대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관찰하고 포착해 낸 것 같다.


2019년 설문조사와 기사라고 한다..


나의 덕질은 4년이 좀 안되게 유지되었고, 그 대상은 20대 가수 K였다.

소설 속 '유리'처럼 잘생겨서 좋아하진 않았지만, 좋아하고 나니 "잘생겨 보였다".


배 아파 낳은 것도 아닌데, 내게 자식이 생기면 이런 기분일까 들뜬 모성애가 나를 덮치기도 했다.

K의 탁월한 연주실력과 작곡능력을 나만 알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고, 길가는 사람 붙잡고 전단지만 나눠주지 않았을 뿐, 온라인으로 '내 새끼 챙기기'를 몰입하여 아주 강성적으로 했다.


K의 천부적인 재능을 어쩌다 다른 뮤지션이 알아보고 작곡 의뢰가 들어오거나, 드라마의 OST로 사용된다는 소식이 들리면, 소위 '아직 뜨지 않은' K에게 인생 일대의 기회가 될 것처럼 나는 들떴었다.

비상장주식에 투자한 투자자처럼 굴었다.


밤 지새우는 부엉이처럼 매일 K의 이름을 검색하고, 한국어 외에 영어나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된 모든 기사와 SNS를 찾아보고, 그 속에 담긴 뉘앙스를 해석하고 떡밥들을 모았다.


2016년 기사에도 덕통사고 개념이 소개돼있다


'덕통사고'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마치 의도하지 않았고 예견할 수 없는 교통사고처럼 사랑에 빠지고 덕질을 하게 된다는 덕질의 속성을 나타내는 은유다.

야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밤 10시 정도에 우연히 Genie(그때는 유튜브 구독이 없었다) 어플로 스트리밍 음악을 듣다가, '최신 발매 음악'에서 자동으로 선곡해서 나오는 어떤 노래를 듣고 그때 나는 덕통사고를 당했었다.


음악이 참 좋아서 집에 돌아가서 K를 검색했고 밤을 꼴딱 새우며 K의 스토리를 흡수했다. 그렇게 K를 알게 되고 나서 내가 한 일은 등촌동 SBS 홀에서 그의 무대를 직관하기 위해 신청한 것이다.


그날 현장에서 만난, 나처럼 덕통사고를 당한 내 나이 또래 덕질러들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소설 속 '우미'는 '유리'의 팬 사인회에서 '안전한 정상 여자 팬'으로 보이기 위해 적당히 사치스러운 옷차림과 장신구를 하고, 가짜 남편을 대동한다.

나는 내 결혼식에 참석한 덕질 친구들을 통해 '나의 덕질은 비정상이 아니었음'을 신랑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왜냐면, 덕질 행위가 비정상적인 행위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비덕질러에게 '내 덕질은 건강했음'을 말로 이해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럴 땐 나의 덕질팸들이 얼마나 건전한 개인 생활과 사회적 입지를 갖고 있는지, 기혼자들은 남편과 아이에게 얼마나 충실히 역할을 다하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줌으로써 조금이나마 그 의심을 거둘 수 있다.


과거의 덕질에 대해 온화한 태도를 보였던 우리 신랑은 과연 내가 다시 덕질을 시작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덕질 보인자를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덕통사고는 또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세계를 떠났지만, 아직 프로 덕질러로 살고 있는 내 덕질 친구들처럼 내가 그 세계에 다시 들어가면, 우리 신랑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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