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치 감사 69일차
1
나는 강박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요.
어렸을 때의 강박은 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양치 후에 반드시 5번 입을 헹궈야 한다,
계단을 내려갈 때에는 마지막에 닿는 발이 왼발이어야 한다 같은 아주 사소하고 이상한 것
딱히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들인데 괜히 안 지켰다간
나비효과처럼 큰 화로 돌아올까 싶어 찝찝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강박은 내 일상을 틈틈히 침투해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게 얼마나 컸냐면, 한 번 이런 일도 있었어요.
고 3 때, 9월 모의평가에서
언어 지문을 읽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노래의 한 구절을
다섯번 끝까지 되뇌어야 지문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는 강박에
지문 한개를 20분 동안 잡고 있다가 등급이 다섯 개나 내려간 적도 있었어요.
그 강박들이 대부분은
그럴싸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날 더 끔찍히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2
나는 이유없는 강박이 감히 내 일상을 좀먹지 못하도록 몸을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면 그런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거든요
그러나 바쁜 일상 하나하나에도 강박들이 촘촘히 박혀있었습니다
완벽주의라는 말은 너무 거창해요
저는 그저 매사에 강박주의였습니다
내가 정한 기준에 못 미치면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그게 일이든, 인관관계든, 연애든 말이예요
찝찝하고, 모자란 부분은 꼭 큰 화를 가져올 것 같았어요
강박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고, 지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3
어딘가에서 그런 걸 읽은 적이 있었어요
최고의 연애라는 건
온전한 사람 둘이 만나 서로가 온전한 사랑을 주는 것
대리만족이나 외로움의 탈피에 대응하는 말이었겠지요
너무 인상깊었습니다.
그동안 내 연애는 마치 외로움의 탈피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일단 온전한 사람이 되자
외롭다고 또 다른 누구를 만날 것이 아니라,
일단 먼저 내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연애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마치 수행하는 사람처럼 내 자신에 대해 깊은 성찰에 빠졌습니다
혼자 생각에 빠져보기도 하고,
누군가와 이런 생각들을 나눠보기도 하고,
이렇게 블로그에 내면을 글로 나타내도 보고요
혼자로 바로 서는 연습을 계속계속 했습니다
사실 이번 100일 간의 미국 여행도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어보고 싶어서도 있었지요
지금껏 갖지 못한 경험들을 새롭게 얻고 해결하고
그런 과정 속에 난 좀 더 온전해질 수 있을거다,
그럼 난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4
온전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 후 계절이 여섯 번 지났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미국, 이 흥미로운 낯선 곳에서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내 모습에서
그리고, 이 곳에서 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을 찾아 빨리 더 채워넣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내 모습에서 강박에 시달리던 나를 발견한 것
자유를 찾아서 떠난 자유 여행에서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자유를 스스로 빼앗고 있었던 겁니다
다치는 바람에 발이 묶이고서야 나는 그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강박이 나를 잡아 가둔 것이 아니라,
내가 강박을 꽉 잡고 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5
그 동안 온전함을 완전함과 착각했던 겁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끝없이 계속해서 나를 다그쳤던 시간들
사실 온전함이라는 건
완전해지는게 아니라
스스로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란 걸 몰랐습니다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완전이라는 걸 갖기 위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허울 좋은 다짐으로
스스로를 칭찬해주지 못하고 학대하고
강박이라는 규제를 만들어 내 자신을 가뒀습니다
아마 분명히 지금 이대로도 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일 것이고,
간혹 실수도 하겠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꽤 괜찮을텐데
나는 그게 내가 온전하지 못한 이상한 사람이라는 뜻일까봐 지독하게도 겁을 냈었어요
그게 다 겁이었어요
6
다쳤다는 그 발이요
그 삔 발에 피멍이 시퍼렇게 들었습니다
의사가 그러는데 3주 동안은 가만히 쉬어야 한대요
마음도 마찬가지겠지요
지난 한 해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완전해야 한다고
학대시켜왔던 내 마음에 피멍이 든 거예요
그래서 지친 내 자신을 마음을 위해서
남은 이 한 달은 아무 것도 생각도 안하고 가만히 쉬려고 해요
영화도 보고 만화도 보고 그러다가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눈 감고 있어도 보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없이 자유롭게 둘 겁니다
새로운 것을 찾는 것 만큼이나 지금 나한테는 그게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얼마 지나면
내 마음에도 멍이 빠지고 건강한 핏기가 돌면
그러면 차츰
내가 바라던 마음이 넓고 여유로운 너그러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 것도 함부로 다칠 수 없는 절대안정
내 인생 진정 힐링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