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1)

여행 에세이는 아닙니다

by 김보


정답! 거기 그, 쌀 유명한 데!


땡! 소리가 아팠다. 거긴 여주겠지. 등짝을 맞았다. 때는 바야흐로 2011년, 장범준이 슈퍼스타K로 데뷔도 하기 전이다. 스무살, 대학시절 처음으로 만났던 J는 여수 출신이었다. 다른 지역의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은 처음이기도 했고, 고등학교 시절 지리 시간에 내내 그림만 그렸던 나로서는 그 애가 여수에 대해 물었을 때 여주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대견한 것이었다. J는 다른 지방 친구들이 그러하듯 여수에 대해 설명할 때 반짝반짝 눈이 빛났다. 인구부터 특산물, 축제까지 여수의 자랑할 만한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했지만 정작 나는 여수에 큰 관심이 없었고, 그 애의 말투 속에 드문드문 숨겨져 있는 여수 사투리나 찾아내는데 바빴다. 그 애는 오랫동안 내가 아는 여수의 전부였다. 이십대 내내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여수를 다시 마주치게 된 건, 대학시절 마지막 여자친구, 수미상관처럼 그 친구 또한 여수 토박이었다. 혹시 여수와 어떤 운명이 있나? 내가 여수스러운 무언가를 좋아하는게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여수는 언젠가부터 늘 내 안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수 여행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2019년 9월 즈음, 그러니까 회사에 입사하고 반년 쯤 되었을 때다. 그 해 여름 날씨 만큼이나 자비 없이 내리 쪼이던 고된 부서 적응기가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조금 느껴질 만큼 마음에도 여유가 조금 생겼던 그 쯤, 처음으로 길게, 무려 사흘이나 연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해외를 나갈까 했는데 학생 때는 좀처럼 느낀 바 없던 '버거움'이라는 감정이 턱하고 가로막았다. 내가 많이 지쳤구나, 지금은 새로움보다 편안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때다 싶어 그 동안 아껴둔 여수를 꺼냈다. 바쁜 게 끝나면 그림도 다시 그려보겠다며 호기롭게 사둔 아이패드도 챙겼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나그네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의도 없이 진행되는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날 구름이, 달이, 풍경이 마음에 꼭 들어서 편안하게 마음이 풀어지는 그런 여행을 기대했다.


장범준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도착하고 보니 어스름한 저녁이었고, 가보려던 식당이 바닷가 앞이었다. 그러니까 시작부터 대뜸 ‘여수 밤바다’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남겨놓는 편이라거나, 그 노래 덕분에 기대가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준비가 덜 됐다. 테마곡 선정을 위한 분위기 파악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내 여행에 있어 중요한 의식이었다.

어떤 사람은 여행지에 도착하면 곧바로 향수를 하나 사서 꼭 내내 그 향만 뿌린단다. 그러면 일상에서도 그 향을 맡을 때마다 그 때 여행지를 떠올릴 수 있다고. 나에게는 노래가 그렇다.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노래가 분위기에 어울릴지 고민하다가, 한 곡, 혹은 가수 하나를 택하고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의도적으로 그 노래만 내내 듣는다. 그러고 나면 언제든 그 노랫소리만 들으면 그 여행의 한 가운데로 돌아가는 일종의 ‘파블로프의 개’가 될 수 있다. 지금도 김사월 노래만 들으면 샌프란시스코와 타코 냄새가 떠오르고, 에피톤 프로젝트 목소리에선 친 퀘테레의 달큰한 리몬첼로 향이 떠오른다.


광장을 가로질러 바다 앞으로 뛰어갔다. 반짝반짝 화려한 조명을 가득 품은 널따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여수라서 <여수밤바다>를 듣고 싶진 않았다. 그건 너무 뻔하니까. 바다 노래 몇 가지를 떠올리다가, 나는 문문의 <애월>을 골랐다.(물론 문문을 좋아해서는 아니다) 이상하게 제주도 애월에서 들었을 때보다 여수에서 듣는 <애월>이 더 어울렸다. 노래 맨 뒤 아-앗, 아, 아-앗 하는 후렴구가 꼭 알록달록한 조명들이 여수 밤바다에 물감처럼 멀리 멀리 풀어지는 모습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애월>이든 <여수밤바다>든 바다를 표현하기엔 아뭇소리 없이 기타 소리가 제격이다. 현을 쓸어내리는 손톱소리가 꼭 서늘한 파도소리를 닮았다. 철썩 철썩.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 서늘한 소리를 좋아한다. 쓱 쓸어내리듯, 싹 씻겨나가듯, 쓱-싹-쓱-싹. 가슴에 쌍시옷들이 반복해서 박힐 때 그 쐐기같은 서늘함에 오히려 마음이 안도하는 것이다. 그게 사람들이 바다와 기타소리를 좋아하는 이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 시절 나는 헝클어진 마음을 빗겨낼 쌍시옷이 그렇게도 필요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바다를 그리워 했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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