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존경하는 인물은 한석율입니다"

intro

by 김보


얼마 전 퇴사 면담을 했다. 정확히는 휴직 면담이었으나 회사 제도에 있는 1년 장기 휴직을 이용할 예정일 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음을 파트장님께 알렸다. "만 3년차에 뭐 그리 힘들어 벌써 나가느냐"는 물음에, 나도 모르던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보같은 대답을 했다. 이럴 땐 코로나가 고맙다. 바보 같은 표정을 마스크로 코 아래로나마 감출 수 있으니. 글쎄, 나도 정말 모르겠다. 한때는 애사심에 푹 빠져서, 이곳에서 실력도 성격도 인정 받는 인싸가 되어 사원대표를 지내는 게 내 꿈이었는데, 나는 어떤 지독한 권태기를 지나 이별을 앞두고 있는 걸까. 지난 3년을 되감아보다 취업준비 시절이 툭 떠오른다.


'당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쓰시오'. 중고등학교도 아니고 초등학교에서나 볼 법한 질문이 회사 지원서 첫 항목에 있었다. 질문이 순수한 건 둘째치고, 요즘 누가 촌스럽게 '존경' 같은 걸 한다고. '리스펙'이면 모를까. 하다 못해 '샤라웃' 정도라도.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이미 나처럼 존경을 잃은 사람들이 검색한 '자소서에 쓸만한 존경하는 인물 리스트'가 연관 검색어에 뜬다. 거창하면 김연아, 스티븐 잡스고, 소탈하면 부모님이라도 쓰란다. 나는 그닥 존경심이 생기지 않았다. 내 패기를 보여주며, 내 이미지를 예상케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꽤 많은 고민 후 나는 그의 이름을 적었다. '한석율'


입사 때 지원서


한석율.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넉살 좋은 감초 캐릭터다. 그는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생동감 넘쳤다. 사람 좋아하는 인싸 성격에, 현장에 대한 열정, 그 특유의 재치있는 제스처까지도. (변요한의 연기가 찰졌던 게 크겠지만)나는 한때 그런 한석율에 푹 빠져있었다. 사실은 미생 그 자체에 빠졌다는 게 더 정확하다. ‘세상에 오상식 같은 상사가 어디 있나', '회사 판타지물' 말도 많았지만, 어딘가엔 분명히 있을 ‘원 인터’(미생의 배경이 되는 회사)를 꿈꿨다. 힘들지만 하루 가득 보람찬 임무를 마치고, 그 숭고한 고됨을 아는 동료들과의 찐한 한잔, 마치 이 서울의 주인공이 나라는 듯 사원증을 메고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당당히 활보하는 모습. 그래 미생이 판타지물이라면, 그들은 현실감 있는 히어로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한석율 같은 멋진 회사원이 되는 것이 내 꿈의 전부였다.


내 자소서의 한석율이 한 몫 한 걸까. 이듬해 나는 가장 가고 싶던 꿈의 기업, 그것도 강남 한 가운데 위치한 곳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한석율처럼 되고 싶어 난생 처음 가르마를 길게 길러 띄웠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솔직히 말하자면 내 앞머리 가르마는 3년 간 여전하지만 조금도 한석율과 닮아지지 않았다. 미용실 선생님 말론 나는 모발이 얇아 축 쳐지기 때문에 원래 불가능한 스타일이란다. 박살난 로망은 머리스타일 뿐이 아니었다. 회사 생활에 대한 내 로망은, 아득한 괴리감과 그보다 더 충격적인 자괴감으로 차근차근 곤두박질 쳤다. 드라마 각본과 달리 매일 보는 실무는 드라마틱하게 짜여지지 않았고, 주인공의 성장이 주제인 드라마 스토리와 달리 회사는 매출 성장 만이 유일한 주제였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니까. 엔딩 없이 전개-위기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서사의 전부인 이 곳에서, 한석율 포함 미생 멤버들은 퇴장한지 오래고 눈빛 잃은 엑스트라만 매일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게 너무나 차갑도록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차가웠던 것은 이 곳의 '말'이었다.


회사의 말들은 대개 인간미 없이 서늘하고 날카롭게 날이 섰다. 분명한 의사 전달과 업무의 효율이 그 목적이겠으나, 경계를 늦추는 순간 베이고 상처 받을 양 무시무시하다. 칼부림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회의와 피 터지듯 오고가는 메일들을 많이 봐오지 않았던가.(회의실 이름이 대놓고 ‘War room’인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모인 곳의 일원'이라는 '회사원'이란 말은 너무나 평화롭다. 우리 전사들에겐 '직장인'이라는 호칭이 더 알맞다. 이곳은 직장(場). 직분이라는 갑옷을 두르고 상대방의 가슴을 향해 날 선 말을 겨눈 전장. 우리는 매일 아침 이곳에 일렬횡대로 헤쳐모인다. 비장하게. 흠흠, 하고 칼 대신 ‘말’을 날카롭게 다듬으면서. 돌이켜보면 입사 신입 시절 OJT 교육의 가장 큰 비중 중 하나는 말을 다듬는 것이었다. 둥글고 서사가 많았던 학생의 말을 버리고 날카롭고 결론이 똑부러지는 직장인의 말로. 나의 첫 직장 사수는 특히 대행사에게 메일을 쓸 때에는 ‘부탁드립니다’라던가,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얕보이거나 책임 소재가 함부로 넘어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훈련병 시절 다나까를 가르치던 조교가 오버랩되었다. 애초에 ‘사수’ 또한 군대 용어가 아니던가.


미생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한석율은 마땅히 존경할 인물이 아니다. 극중 뺀질뺀질한 캐릭터로, 사수와 갈등이 잦으며, 말실수도 많다. 회사 생활이 완전히 꼬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입사 이후 에피소드에서 행복해 하는 장면이 거의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 한석율을 존경한다고 말한 대가로 비슷한 직장인의 운명을 살게 된 건가. 하고 이 지난 3년의 결과를 절묘한 상황 탓으로도 돌려본다. 괜시리 눈을 가리는 긴 앞머리가 거추장스럽다. 퇴사를 얼마 앞두고 요즘은 내가 사용하고 들었던 직장인의 말들에 대해 떠올리는 중이다. 업무 보고부터 실무 이야기, 심지어는 뒷담에도 직장인 그 특유의 문화가 있었다. 차갑디 차가웠던,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그리고 그 3년간의 시린 직장인 김보성의 이야기들을, 직장인의 말로 되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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