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7~32 레온
#1
여행은 낭비다.
혹자는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금전 감각이 맛탱이 가는 느낌이 좋아서란다.
일상에서 열심히 아껴서, 비일상에서 흥청망청 쓴다.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진귀한 음식, 액티비티, 뷰 좋은 호텔… 일상에 없는 큰 자극일수록 좋다.
자극의 크기와 비용은 대부분 정비례한다.
여행은 얼마나 잘 낭비했는가로 기억된다.
#2
견문.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이 단어는 ‘보거나 듣거나 해서 얻어진 지식’이라는 뜻이나,
이제는 오직 부모님께 해외여행의 당위성을 설득시킬 때만 사용된다.
그 짧디 짧은 시간의 견문을 가지고 돌아가봐야, 인생의 인사이트는 커녕 영어실력도 일취월장은 드물다.
여행 후 넓어지는 세상이란
세계맥주를 고를 때 디테일한 기준 몇 가지와 ‘짠’을 외칠 때 배리에이션 같은 거, 그리고 SNS의 피드 몇 장 정도가 있겠다.
화려한 비일상의 이색 경험들은, 한국에 돌아오면 쓸모를 다하고 어딘가 뒷편에 처박힌다.
그러다 언젠가 추억팔이할 때 한 번에 꺼내어 전에 그런 곳에 갔었더랬지 한다.
견문이라는 단어가 해외여행용으로 단축되었다면, 그 진짜 뜻은 ‘기념품’ 정도가 적절하다.
#3
염세의 표적은 나다.
스물 네 살의 첫 유럽여행을 시작으로
지금껏 돈 조금 생겼다 싶으면, 시간 조금 났다 싶으면 혼자서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어김없이 모든 걸 낭비하고서야 돌아왔다.
어디 부유한 댁의 자제도 아니고, 해외와 관련된 공부나 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쓸데 없는 걸 잘 사다 모으는 사람처럼 낭비할 데가 필요했던 것 뿐이다. 시간이든, 돈이든.
그러니까 나는, ‘여행에 미치다’ 같은 게 아니라
비일상, 낭비, 쓰잘 데 없는 기념품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4
‘유랑’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
유럽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이 커뮤니티의 주된 목적이다.
나처럼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여행이 심심하고 외로울 때 동행을 구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영국의 소도시에서, 또 어딘가에서 그렇게 네댓 번 동행을 구했다.
그 중 몇 번은 마음이 꼭 맞아서 몇 날 며칠을 함께 여행했다.
오랜 친구처럼 티키타카를 주고 받았고, 믿을 수 없는 여행지의 우연한 장면 같은 것도 많이 마주쳤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급속도로 친해져
단 몇 시간 새 발을 맞추고 말을 맞추는 사이가 될 수 있던 건
이 곳은 비일상의 한 가운데, 여행지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잊었다.
관계에 심취했다.
“우리 한국에 돌아가서 꼭 다시 만나자.”
한국까지 가져온 운명적 관계는 모두
내가 추억상자에 처박아둔 기념품들처럼 일상에서 가치를 잃었다.
아무리 그 때의 일과를 되새기고 추억 보정으로 애써봐도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여행지에선 그렇게 빈번했던 특별한 우연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5
감정 낭비.
시간 낭비와 돈 낭비는 애를 쓰면 회복이 됐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따금씩 그 사람들을 떠올릴 때 미안한 기분이, 실망이 함께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그 사람도 나처럼 그랬을까.
한국에서 다시 만난 내가 실망스러웠을까.
어찌 되었든 나에게 ‘한국에서 다시 보자’는 여행지의 금기어가 된다.
나는 그저 낭비를 쏟아내려고 비일상에 방문한 사람이고, 한국의 일상 속엔 그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몇 번의 감정 낭비의 쓴 맛을 보고서, 다시 여행지에서 유랑에 접속하는 일은 없었다.
#6
순례길 삼 분의 이 지점, 레온에 도착했다.
극에서의 ‘절정 파트‘, 곡에서의 ‘두번째 벌스와 끝 그 사이‘.
일반적인 예술 작품에서 삼 분의 이 지점을 황금비율이라고 지칭한단다.
레온은 걸으며 만나는 곳들 중 가장 크기가 크고 아름다워서, 황금비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다.
메세타를 지나오느라 심신이 지치기도 했던 나는 이 곳에서 사흘 정도 쉬어가기로 한다.
지난 밤 야간행군을 지낸 여파로, 알베르게 체크인할 힘도 없이 노숙자처럼 벤치에 누워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아침 아홉시였다.
#7
정오의 뜨거운 태양에 잠에서 깼다.
땀에 쩔었고, 배가 고팠고, 피곤했다. 몸에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숙소를 찾아야 했다.
가장 꼬질꼬질 했던 그 때, 그 앞을 지나던 U를 만났다.
귀 밑으로 짧게 친 숏컷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한국인 여자애 U는 나랑 같은 순례자로, 레온에서 며칠 쉬고 있다고 한다.
한 일주일만에 처음 만난 한국인이 너무나 반가웠기에 말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내 첫 마디는 하필 행색 만큼이나 꼬질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스시 파는 데 아세요? 저 스시가 너무 먹고 싶어서요…”
대도시에서 가장 절실하게 하고 싶었던 건 낭비였다.
내가 아는 해외여행 방법대로 나는 틈만 나면 낭비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순례길의 소박한 시골 마을에선 번번히 허락해주지 않았다.
레온에 도착하면 반드시 값 비싸고 신선한 스시를 마음껏 먹으리라, 그렇게 내내 다짐했었다. 지만, 첫 마디에 그건 정말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 역시 스시를 먹으려던 참이라고 했다. 재정비를 좀 하고서 스시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다. 카톡을 교환하고 뒤돌아섰다.
내 첫인상이 스스로 너무나 창피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잠도 달아났다. 잰 걸음으로 달아나듯 걸었다.
#8
U는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숏컷과 허스키한 목소리, 제 몸통을 상회하는 사십 리터 배낭에, 그 배낭을 더 커보이게 만드는 아담한 체구.
외모부터가 순례자들의 평균치에서 확실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진짜 개성은 그녀의 안쪽에 있었다.
자유로움을 찾아 떠나왔다는 그녀는
일반적인 까미노의 일정이나 코스는 전혀 상관 없이 마음대로 여행하고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자신의 철학을 말을 하고는 했다.
“너에게 나를 맞춰가고 있다 말하지마,
나에게 너를 초대할 뿐야.”
이 가사 때문에 정경화의 <나에게로의 초대>를 가장 좋아한단다.
잘 어울렸다.
초대는 애초에 차려진 것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녀는 내면에 차려둔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뚜렷한 것은 개성이 아니라
그녀의 주관,
그녀의 세상이었다.
#9
그 날의 스시는 완벽했다! 와인을 보틀로 세 병이나 마셨다.
분명 메뉴판의 하얀 글씨만 무한리필이라고 들었으나, 우리는 빨간 글씨의 스시를 무작위로 시켜댔다.
그 명분이 고된 순례길의 자기 보상이었는지, 해외여행의 습관이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우리의 의견은 전부 합치했고, 웬만한 건 전부 맛있었다. 미친 놈처럼 올라가는 금액에 중국인 식당 주인만 노났다.
스시집을 나오고 나서도 무한리필은 이어졌다. 이차로 무언가 진 토닉 같은 걸 먹으러 갔던 것 같기도, 삼차를 갔던 것 같기도.
명백한 것은 이 길 위에서 처음으로 만취했다는 것.
처음 본 사람 앞에서 나는 뭐 그리 신이 났는지
말들을 끝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리필했고, 몇 가지는 채 줍지도 못한 채 기억에도 없는 귀가를 했다.
그 다음 날도 낮부터 술잔치가 계속된다.
이 곳 스페인 사람들은 이렇게 대부분 늘상 술을 마신다.
물 대신 맥주고 상그리아고 마티니다. 그러니까 다들 처음 본 사람도 “아미고, 아미고(친구)” 한다.
며칠 연속 물처럼 술을 마셨더니 둘도 없는 술친구가 되었다.
인간 관계, 종교, 철학… 장르와 주제를 망라하여 이야기가 쏟아진다.
같은 순례자 신분부터 같은 MBTI, 같은 나이까지 공감대가 널렸다.
척척 말이 통한다. 오래 본 친구처럼.
그럼에도 내 세포 어딘가는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여행지의 우연은 어차피 떠날 때 다 여기 두고 가야하는 거 잊지 말라고.
안다. 나는 그냥 술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술 때문에, 취한 김에 날 좀 많이 꺼내놓은 것 뿐이라 한다.
#10
어김없이 맛이 갔던 그 셋 째 날 밤,
한 위스키 바에서 나는 아이패드를 켜 그 동안 길 위에서 그렸던 그림을 보여줬다.
U는 그게 흥미가 생겼는지 빈 종이를 하나 켜달란다.
곧이어 액정 위로 거침없는 선이 몇 개가 지나가고,
그녀의 철학이 내 앞에 꺼내질 때처럼 불쑥, 하고 내밀어진다.
“나 그림 그리는 거 처음인데, 이거 살릴 수 있겠어?”
도전장이다.
그림이란 원래 단순한 선 몇 개 위에 최소한의 색만 발라도 형태가 살아나지만,
그녀의 말에 어떤 오기가 생겨서 전문성을 증명해보이고 싶어졌다.
초보자의 날것의 선 위에
오버레이와 멀티플 쉐도우, 톤다운된 트렌디 컬러 같은 걸 발랐다. 최대한 현란하게, 현학적으로.
좁다란 위스키 바의 테라스에 그녀의 격렬한 리액션이 쩌렁쩌렁 찬다.
몇 가지 도전장이 더 날아온다. 나는 디제이가 즉석에서 드랍한 비트에 프리스타일을 하는 랩퍼처럼 된다. 다행히 지난 한 달 간 내내 그림을 그렸다.
도전을 모두 완수해내고, 우리는 상호간에 우리의 그림이 꽤나 그럴싸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우리 이걸로 여기서 챌린지 하자!”
그 계획을 어렴풋이 말했었던 건 나였으나, 확신에 찬 목소리는 그녀가 낸다.
프로젝트 제목은 <레온 시민 백 명 그리기>.
초심자가 그리는 선에, 전문가가 칠하는 색. 대상은 아무나 즉석에서. 그 콜라보는 무조건 성공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컨셉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또한 이 꽤나 마음에 드는 레온에서, 까미노의 클라이막스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도 합치했다.
지체 없이 내일부터 이박 삼일 동안 바로 시작하기로 한다.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잔이 깨져라 마티니를 부닥쳤다.
어제 스시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때의 마음이 되어 잠에 들었다. 아니, 설레서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11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오십 명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렸다.
조금 더 와닿게 표현하자면, 도네이션으로 삼 백 유로, 삼십 오 만 원 정도를 벌었다.
성당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고, 꽤 많은 레온 시민들이 화답했다.
그것은 여행지의 나처럼, 누군가의 기분 좋은 낭비였으리라.
그렇다면 낭비는 낭비로 화답하고 싶었다. 도네이션으로 번 돈은 모두 먹고 마시는데 쓰자고 말한다. 역시나 U는 격하게 동의한다.
같은 술이라도 노동을 타면 더 달다. 그림 그려 번 돈으로 사먹는 술은 행복한 맛이었다.
그렇게 다시 이박삼일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
이 정도면 순례자 보다는 '술'례자다.
#12
여기 길치 둘은 이제 레온을 눈 감고도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림 그린답시고 술 마신답시고 일주일 간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닌 탓이다.
몇 번씩이나 갔던 바 한 군데서 와인을 시키고 서로 소감을 묻는다.
각자 느낀 것은 대동소이 하지만 완벽히 일치하는 건,
레온은 이 순례길에서 잊지 못할 도시가 되었다는 것.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그녀에게
나 또한 특별한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며 공을 돌렸다.
이 도시의 일주일 동안 우리는 순례자가 아니었다.
해외여행의 동행이었다.
U 덕에 순례의 경험 외에도 한국에 가지고 돌아갈 견문을 얻었다.
레온에서 늘어놓은 그녀의 철학 덕분이다.
U는 레온에서의 일주일을 채우고 먼저 떠났다.
나는 하루 남아 밀린 글과 생각을 정리하겠다 한다.
그녀가 떠나고, 알베르게 지하 식당에 앉아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이 도시의 지난 사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글로 옮기려는데 사건들 위에 표정이, 말들이 덮힌다.
죄다 U의 것이다.
내 것이 없다.
#13
여행지에서 누구에게도 곁을 길게 주지 않았던 건 내 자기 방어였다.
감정 낭비를 피하고, 내가 만들어 나가는 여행을 방해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이렇게 누군가 방어벽을 허물고 깊숙히 들어오는 순간,
여행은 사건과 배경 중심에서 인물 중심으로 서술 방식이 바뀐다.
여행의 주체가 혼자가 아닌 둘이 된 순간, 내 기억의 주인은 바뀐다.
가령 내가 언젠가 레온을 떠올릴 때는 기억 속 거기에 항상 U가 있을 것이다.
U는 언제고 그 광장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고, 그 알베르게 앞 횡단보도에 쪼그려 앉아있다.
내가 그 시간을 좋아했기 때문에, 레온의 좋았던 기억이 대부분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레온을 떠난 이후에도 그 곳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가 있는 세상으로 초대된다.
샌프란시스코를 떠올렸을 때, 영국의 소도시를 떠올렸을 때도
그 곳을 내 가장 행복했던 여행지로 기억하는 까닭은,
내가 잘 낭비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색 경험이 아주 특별했던 게 아니라
내 기억 속 그 곳에 그들이 항상 남아있어서, 그 때의 나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멈춰있기 때문이다.
내 좋았던 여행의 기억에는 모두 그렇게 사람이 있었다.
#14
대개 여행은 얼마나 잘 낭비했는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좋았던 여행’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내가 혼자서 벌인 자극과 낭비는 그 여행지의 모습과 함께 쉽고 허무하게 가물가물해지지만,
함께 했던 사람과의 기억은 그 여행의 인상으로 결정되어 추억된다.
내가 그 때 그 여행이 그리워져서 그 곳에 또 다시 찾아가더라도
그 때의 감동과 행복은 좀처럼 찾지 못하고
그러다 결국 그 곳에 남아있는 그 때 그 사람과의 흔적들을 쫓게 되는 까닭이다.
나에게 그 사람은 어떤 기억으로 남는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그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은가.
그런 것이 결국 여행을 풍성하게 만든다.
이 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일도
결국은 이 낯선 땅, 여행자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 이유였다.
그 사람들이 언젠가 그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을 그려주던 수염 난 동양인 남자가 떠오를 테니까.
결국 그들에게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니까.
#15
나는 여전히 우리가 한국에서는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내 추억 속 레온의 주인은
그대로 한국에는 오지 말고, 내 허접한 일상 곁에는 절대 오지 말고
그냥 계속 레온에, 그 곳에 자유롭게 남아있어주길 바란다.
나도 U의 기억 속에
처음 그려본 그림에 색을 덧입히던 동업자로, 낯선 도시에서 만난 술 친구로
언제고 즐겁게만 남아있길 바란다.
이것은 일상의 낭비로부터 겨우 도망쳐서
또 다른 낭비나 하러 이 자유의 길을 떠나온
자유로운 척 했던 내가 하는 부끄러운 고백이자 고집이다.
U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너의 세상에 초대해줘서 고마웠다고, 덕분에 낯선 땅 레온에서 참 따뜻했다고.
Day 27~32 레온
462 / 779 km
93 / 213개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