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간 글쓰기 2일차
오늘도 기어코 10시를 찍는다. 퇴근 시간 밤 10시. 새벽만 빼놓고(어떤 때는 포함해서) 아침, 점심, 저녁, 밤까지, 회사는 내가 뭐가 그리 좋은지 내 모든 시간에 집착한다. 하루를 빼앗긴 분한 속에 좋은 술 부어 달래주는 것이 관성적인 낙이었으나, 코로나 통에 그것도 다 뺏겼다. 아홉시에 술집 문들을 닫으면 나 같은 야근러는 어디서 한잔 하나. 어디긴 어디야. 편의점을 들른다. 필라이트 두 개를 집었다가, 분한 마음에 에잇하고 양주 한 병을 집는다. 조니 워커. 걸맞는 안주는 하몽이랑 치즈가 좋겠다. 총 삼만 얼마가 나온다. 술집이랑 얼추 비슷해 묘하게 기분이 흐뭇하다. 이 정도 사치는 해줘야 빼앗긴 것에 쌤쌤이 얼추 맞다. 확실히 사치가 늘었다. 얼마 전에 산 컬러 전구에 보라색 조명을 켜고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내 방구석을 와인바로 만드는 Playlist'를 틀어놓으니 제법 느낌이 난다. 조니 워커 한잔, 치즈에 하몽 한 입. 음... 이게 바로 대기업의 맛인가. 미지근한 조니워커는 통장 잔고 만큼이나 참 쓴 맛이다.
나는 대기업에 취업했다. 하나님께서 대기업에 들어가기만 하면 좋겠다는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회사로 대변되는 나의 높은 가치와, 그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멋진 사람들과의 협업, 그리고 두둑한 보상. 덕분에 우리 부모님은 아들을 자랑하느라 여러 문장을 댈 필요가 없다. 그 때는 대기업 사원보다 멋진 직업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기업 때문에 이렇게 많은 것을 뺏길 줄은 그 때는 꿈에도 몰랐다. 지금 나는 나를 꽉 채웠던 나의 자유와 저녁시간, 건강, 자존감 뭐 그런 것들을 죄다 빼앗기고서 또 금방 출근하는 아침이 올까봐 허겁지겁 술을 처 넣는다. 29년 간 봐와서 아는데,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대기업이 뭐가 좋아' 내 회사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나는 내 빼앗긴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면 조니워커의 맛을 몰라도 좋고, 유튜브에 5분 마다 광고가 나와도 좋다. 나는 나를 소개할 때, 오히려 여러 문장을 대던 그 때가 차라리 좋다. 회사에 다 빼앗기고 아등바등 자기 새벽까지 바치는 정 과장님처럼 되고 싶지 않다. 회사 때문에 빼앗겼다는 사실도 어느덧 다 잊고 제가 못난 탓이다 하는 외로운 우리 부장님처럼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러려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닌데, 이상한 곳에 도달해 위태롭게 서있는 것처럼 하루하루 오싹하다.
기분이 안 좋다. 이러는 새 똑딱, 어느새 다시 출근해야 하는 새 날짜가 다가온다. 쫓기듯 조니워커를 입에 털어넣는다. 취기가 오르며 옛날 생각이 난다. 내일이 기대가 돼 가슴 설레 잠 못 들던 때가 있었지. 이 기억이 무뎌지지 않길 바라면서, 또 한 잔 마신다. 대기업이 좋긴 뭐가 좋아? 불평 가득 따라, 또 한 잔 한다. 또 슬픈 자정이 온다. 12월 3일, 내 20대 마지막 생일. 축하주 한 잔을 한다. 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