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작하는 거였더라

100일간 글쓰기 21일차

by 김보


‘시작이 반이다’라고 처음 말한 사람,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누군진 몰라도 되게 부지런하게 생겼을 거다. 내 주변에 몇 있다. 첫 구슬만 꿰면 무서운 속도로 목걸이를 완성해가는 사람들. 그것도 값비싼 진주목걸이로. 나처럼 의욕만 앞서고 끈기가 부족한 사람을 위한 개정판도 필요하다. 아직 없는 것 같으니 내가 만들게. ‘시작은 반의 반의 반의 반 쯤이다’ 이 100일간 글쓰는 것도 이제 5분의 1쯤 했는데도 아직 까마득하고 죽겠거든. 돌이켜보면 ‘시작’은 노래방 서비스처럼 겨우 한 16분의 1 쯤, 보너스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시작을 폄하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 거창한 이름 때문에 준비동작이 길게 필요하다는 거. 가파른 저 길을 좀 봐,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테니까, 딱 10분만 누워있는 거다, 아님 맛있는 걸 좀 먹던가. 시간이나 돈을 잔뜩 지불해서 ‘시작’을 한껏 대비해봐야, 실제로는 낭비에 불과하고 오히려 시작하고서 좀 지나야 가속도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 반해 끝은 어떤가. 너무나 성실하다. 막판 스퍼트는 항상 힘이 좋다. 조금만 힘내면 끝이라고 생각하면 없던 힘도 생긴다. 시작과 끝의 시간은 같은 길이라도 그 밀도가 다르다. 10분, 20분 쯤은 우습게 제물로 줘버렸던 ‘시작’과 달리, ‘끝’에서는 1분, 2분도 간절하게 쪼개서 쓴다. 열 두 시 마감이 50분 남은 지금처럼, 온 우주가 힘을 모아 다음 문장을 만든다. 이것 봐, 시간이 없으니 글이 막 자동으로 써진다. 예상하건대 이 100일간 글쓰기의 둘째 자리가 8, 9 쯤이 되는 날이 온다면 내 생활 중 최우선 순위는 다 제치고 이 글쓰기가 될 거다. 얼마 후면 완성할 테니까. 이처럼 끝보다 강력한 동기 부여는 없다. 아, 시작보다 더 절반에 어울리는 걸 찾았다. ‘끝이 반이다


이렇듯 끝에 집중하며 살다보니 가끔 막막할 때가 있다. ‘어떻게 시작하는 거였더라’ 분명 내가 끝을 봤던 일인데, 다시 하려니 시작이 안 된다. 영어 공부, 영상 편집, 다이어트, 심지어 인간 관계까지도. 미루고 미루다 끝에 벼락치기로 달렸더니, 요령만 늘었지 첫 단추를 못 꿴다. 머릿 속에 남은 기억은 가장 열심히였던 모습이기에, 다시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만 같다. 누가 이번에 내 끝이 어떨지 미리 말해주면 좋겠다. 그러면 거기 가까워지려고 어떻게든 시작해볼텐데. 발을 못 떼고 움찔움찔 시작할 만한 동기 부여만 기다리는 거다. 시작 없인 끝도 없지 참. 무슨 일이든 절반은 시작하는데 힘을 다 빼는 것 같다. 선조들이 옳았어. 시작이 반 맞다.


내일 글은 또 뭘 써야하나. 모르겠다. 글감 짜기 전에 일단주나 먼저 한 잔 해야겠다. 아니 변명이 아니라, 난 원래 한 잔 마셔야 잘 쓴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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