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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주 비올라 Apr 12. 2023

엄마의 자존감

내 탓이 아니라도 내가 책임질 수 있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내가 자존감이 무척 높은 사람인 줄 착각하고 살아왔다.

아빠의 사업이 롤러코스트를 타면서

부자 같은 삶과  거지 같은 환경을 왔다 갔다 하는

마치 지옥과 같았던 험난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을 잘 이겨냈고,

아니 정확히는 견뎌냈고,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에서 부족하지 않은

평범한 중산층 시민의 삶을 만들어 낸 내가

 

나 스스로 만족스럽고 

나는 자존감이 높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우연히 엄마가 되었고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무방비 상태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어린 시절 보살핌을 받지 못했구나.

배고프면 먹어야 했는데, 많이 먹었다고 혼나고

내 잘못이라고 착각한 어리석은 나에게

누구 하나 나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냐'

라고 다독여주는 이가 없었다.

"7살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다른 그림을 보고 그려. 그날 대회에 나온 그림 대부분이 비슷한 모양이었단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어린 유아들의 그림대회는 그림을 잘 그리냐 못 그리냐 그 기준으로 심사를 하지 않아. 그림에 그리는 사람의 느낌, 그 사람만의 무언가가 표현되는지를 보는 거야. 어른의 시각으로 보면 7세 유아의  그림 수준은 거의 비슷하단다"

어느 누구도 

주변의 어떤 어른도

어린 나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갖고 있는 죄책감을, 반복되는 고민으로 가득해진 불안을 눈치챈 어른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며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은

잠든 사이 끊임없이 나를 귀찮게 하는 손길마저

그 잘못된 관심마저 

거부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내가 나쁜 아이라서

어린것이 되바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 지나온 사실을

육아를 하면서 

온전히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아이만을 위해 내가 가진 전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아이에게만 맞춰 살아가다 보니

어린 시절의 내가 보였고

그 시절 나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엄마가 보였고

관심은 있었으나 가부장적 사고에 가득 차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던 아빠가 보였다.

내가 경험한 아픔은 

결코 내 잘못이 아니고

내 아픔을 보듬어주지 못한 내 주변의 어른들은

그들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던 것뿐.

어찌할 수 없었던 과거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이렇게 과거의 경험이 떠오르면

'아들이라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딸을 가진 친구들이 부럽긴 하지만

만약 딸을 낳고 그 딸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면

나는 엄마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혹시 엄마와 같이 행동하면 어떡하지?

엄마는 아마도 '아직 이 아이는 어리니깐, 그냥 빨리 잊어버리게 하는 게 나을 거야, 기억해서 좋을 것 없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기억이 당시에는 바로 잊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결국은 결혼이라는 큰 결정을 내가 전혀 사랑하지도 않고 심지어 잘 알지도 못하는, 그냥 바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선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리라고는

결코 추측할 수 없었을 테니..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이 출발일 수는 있어도

원인의 전부일 수는 없다.

결국 내 선택은 나의 책임이니까

어린 시절의 내 경험들은 모두

나의 잘못도 나의 책임도 아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양육해 가는 것

그것은 온전히 내 책임이다

그리고 난 그 책임을 성실히 준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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