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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03. 2020

어떤 번역가의 고백을 읽고

나의 파이를 찾아서

내 번역이 형편없고 오역이 많다며 “백 번 천 번 생각해봐도 번역료를 다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적힌 메일을 받은 날도 있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던 한여름이었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가 쓰레기통 앞에 잠시 주저앉았다. 백 번 천 번 생각해봐도. 백 번 천 번 생각해봐도. 그렇게까지 세차게 뺨을 맞은 기억은 없는 것만 같았다."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노지양


《헝거》, 《나쁜 페미니스트》 등을 번역한 노지양 번역가의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를 읽다가 울컥할 뻔했다. 번역가의 대우가 형편없는 현실이, 이토록 잔인하고도 솔직한 기록이 사실이라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게다가 나름 잘 나가는 번역가 아닌가. 지나치게 우러러볼 만큼 높은 위치에 있지는 않아 더욱 공감이 갔던 그녀건만, 그녀의 글들 속에서 이러한 내용을 발견하자 더욱 힘이 빠졌다.  




안정적인 수준으로 일감을 받고 있을 거라 기대했던 그녀는 이런 말로 나를 또 한 번 무너지게 했다.     


“하지만 《나쁜 페미니스트》의 영광스러운 나날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는 또다시 몇 년 전과 비슷한 날들이 반복되었다. 《나쁜 페미니스트》만큼이나 최선을 다해 번역한 책들이 또다시 독자의 외면을 받기도 했고 번역료는 변함없었고 한 달에 내가 번 번역료를 계산해보면 한숨이 나왔으며 잠시 일이 끊기기도 했고 작업실에서 외로움과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번역가에게 안정적인 위치란 이토록 확보하기 힘든 지위인가. 번역가 지망생들을 위해 희망을 노래하고 싶은데, 이런 글들을 보면 맥이 풀린다. 그럼에도 번역가가 되라고 말해줘야 하는 걸까. 번역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직업일까.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 격하게 공감한 나는 이것이 나의 미래인가, 라는 생각에 조금 주춤해졌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 버린 지금, 조금은 다른 시나리오를 맞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난 7년 간 내 파이를 확보하기 위해 나름 무수한 시도를 해왔다.     


초반 몇 년은 에이전시에서 주는 책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번역했고 그렇게 권수가 쌓이고 실력도 쌓이자 출판사에도 적극 문의해 봤으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나를 알리기 위해 책도 써봤고 아이를 낳고 일이 끊길까 두려워 젖을 물리는 가운데에서도 일을 놓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성심성의껏 노력한 데에는 돈을 벌고 싶은 욕망도 있었지만 잘 나가는 직장을 박차고 나온 뒤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음을 입증하고 싶었다.     

한 때 수입이 상승곡선을 그리며 잠시 안심했던 적도 있었지만 프리랜서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 매년 불황을 경신하고 있는 출판업계와 맞닿은 터라 경제적인 여건은 늘 불안정하다. 분명 쉽지 않은 길이다. 지난 7년 동안 노력했음에도 결코 안정적이지 못한 내 지위가 이를 방증한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의 저자는 여성 노동자를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밖으로 나온 자기만의 방’ 콘셉트의 울프 소셜클럽을 제안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에겐 연대가 필요하다며 야망과 정치를 부르짖는다. 단절되지 말자는 그녀의 조언이 귀에 쏙 꽂힌다.      


분명한 건 내가 어느 지점에 있든, 새로운 출구 혹은 나를 향해 뻗는 손은 어디든 있다는 거다. 아직 찾지 못했다면 부지런히 탐색하고 먼저 다가가야 할 거다. 그곳이 어디든.


어쩌면 지난 7년간의 노력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내 파이를 구하기 위해, 없다면 만들어볼 참으로 새로운 곳을 향해 오늘도 눈을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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