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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03. 2020

《그래도 번역가로 살겠다면》, 비릿한 방황의 흔적

글쓰기는 나름의 처방이었다

블로그 글을 모아 3년 전 전자책을 냈다. 


종이책으로 출간하고 싶었으나 몇 번의 투고 끝에 현실에 부딪히고 만 뒤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다행인지 거절해주신 출판사 사장님들께 일일이 감사 인사라도 전하고픈 심정이다. 나의 어설픈 글들이 활자로 찍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에선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오금이 저려온다. 누군가는 무슨 책을 이따위로 썼어, 하면서 냄비 받침으로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종이책 출간을 포기한 뒤 사장시키기에는 아까워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읽어주었다. 나처럼 바닥에서 시작한 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기 위한 글들이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싶었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어간 블로그에서 전자책 전문 출판사를 만났다. 취지도, 규모도 딱 나의 사정과 맞아떨어지는 전자책 출판사 탐탐일가였다. 어차피 한 권의 책으로 묶지 않는 한 인터넷에 떠돌 정보로 남을 뿐인 걸 뭐 어때, 하는 심정으로 자료를 더 모아 원고를 조금 손본 뒤 투고를 했고 사장님은 눈물 날 정도로 따뜻하게 나와 내 원고를 받아주셨다.      



그렇게 전자책으로나마 이 세상에 나온 책이 《그래도 번역가로 살겠다면》이다. 나와 비슷한 길을 가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글을 쓰고 싶은 나의 욕망이 반영된 치기 어린 첫 작품이었다.      

  



남의 글을 옮기는 게 직업이다 보니 늘 남의 그림자로서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만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갈증에 시달렸나 보다. 하지만 방황하는 마음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어 싸이월드에 다소 우울한 문장을 끼적이던 시절부터 글쓰기를 향한 목마름은 존재해왔다. 삶의 일부가 채워지지 않은 그 느낌은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 사라질 줄 알았다. 크나큰 오해였다. 그 갈증과 목마름은 꿈을 이룬 뒤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나를 시시 때때 찾아왔다.      


나름의 처방전으로 남의 책의 ‘역자’가 아닌 내 책의 ‘저자’가 되어 보려고도 노력도 해 본 끝에야 비로소 나를 구제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건 ‘나만의 글쓰기’였다. 책을 내는 게 목적이 아닌 철저히 나다운 글쓰기가 필요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에서 박준 시인은 “다만 어떤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아도 쓰이는 일만으로 저마다의 능력과 힘을 가지는 것이라 믿는다. 마치 마음속 소원처럼, 혹은 이를 악물고 하는 다짐처럼”이라 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블로그에 올리거나 혼자 일기장에 끼적인 글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혼자 끼적이다 싫증이 난 나는 둘째 아이 출산 직전 《어른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사적인 영어공부》라는 책 한 권을 더 내는 돌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종이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출간이 쉽다는 전자책의 특성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이 두 권의 소심한 출간 덕분에 나의 책 쓰기 욕구는 어느 정도 충족된 상태다. 때로는 다소 비릿한 형태의 무언가 일지라도 욕망을 억누르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걸 직접 경험해 보고 나서야 배우는 나다.  


글쓰기와 번역하기 둘 중 하나야 골라야 한다면 글쎄, 난 조금 망설이다 글쓰기를 선택할 거다. 작가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작가의 뒤에 숨어야 하는 번역가는 그러지 못하니까. 사람은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살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번역하기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할 거다. 번역은 내 밥벌이 수단이고 내가 직장을 때려치우기까지 하고 택한 직업이므로.      


평범한 사람이 글을 쓰고 책을 내는 행위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덕분에 이제는 나 같은 사람도 글쓰기와 번역하기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시대를 잘못 만나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수많은 작가를 생각하면 내게 주어진 기회를 날려버려서는 안 된다는 비장함 같은 것도 솟아오른다.    




김연수는《청춘의 문장들》에서 “글을 쓰지 않고 막연하게 써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번역부터 하고 시간이 남으면, 몸이 덜 피곤하면, 일단 생각 좀 정리하고, 따위의 핑계들로 나를 감싸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안다. 노트북을 켜고 빈 화면에 글자를 적어 내려 가는 순간, 나는 비로소 진짜 생각을 하고 있음을. 낮 동안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생각이 활자로 바뀌는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책에서 읽은 '남'의 생각이 아닌 '나'의 생각을 하고 있음을.


번역이 나의 밥벌이 수단이라면 글쓰기는 나의 영혼을 먹여 살리는 수단이 되고 있다. 


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일과를 숨 가쁘게 달린 뒤 내 말을 쏟아내는 잠깐의 휴식이랄까. 그렇게 충전된 나는 다시 남의 말을 전할 힘을 얻는다. 두 가지가 서로를 돕는다. 상부상조하는 그 선한 관계가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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