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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03. 2020

꿈을 검사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

번역가 이야기

이슬아의《심신단련》이라는 책을 읽었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그녀의 곧은 심지 앞에 존경이라는 단어를 써보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 총명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깨끗함과 더불어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굳은 다짐으로 무장한 그 꼿꼿한 뒤태에서 단단함이 읽혔다.

 

가난을 팔아 돈을 벌고 싶다 했던 그녀는 내가 보기엔 이제 실력으로 부자가 될 일만 남았다. 진심으로 응원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지금 그녀의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의 20대는 그녀처럼 치열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한다. 돈 많이 주는 직장에서 2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청춘을 받쳤으니 나름의 대가는 치른 셈이지만 그녀처럼 가난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때 나름 편하게(?) 산 죄로 지금까지도 이렇게 방황하고 있다.      


그때 나는 딱히 꿈이라 내세울 만한 것 없이 남들에게 채점표를 쥐어준 누구나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어른들 말대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 좋은 회사에 취업한 착한 아이였다. 한 마디로 주체적이지 못한 삶이었다.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성실함과 책임감을 늘 옆구리에 낀 채 살았으며 가훈처럼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 나날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돌아보니 나는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회사에는 꼭 필요한 사람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대에 오롯이 혼자 선 내 모습으로 나를 입증할 수 있어야 했다.   


회사를 그만둘 당시 나는 내 실력만으로 나를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누구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나 하나만으로 기능할 수 있는 사람. 그걸 꿈꾸던 나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기능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나는 번역가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결과 내가 얻은 타이틀은 '잡식형 번역가'였다.


이것저것 따질 여력이 없던 나는 의뢰가 들어오는 책은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고 받았고 어떤 책이 들어오든, 좋은 점만 보려고 했다. 돈도 벌어야 했고 경력도 쌓아야 했다. 내가 어떤 책을 번역하고 싶어 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지도 잊고 말았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라는 소설을 번역했을 때에는 이제 나도 소설을 번역하게 되나 보다, 이렇게 넘어가게 되나 보다 하고 잠시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얻어걸린 행운일 뿐이었다. 그 후의 시간들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얻게 된 기회는 사람을 붕 뜨게 만들 뿐이라는 걸 난 그렇게 배웠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본다. 무작정 달려오느라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행여 놓칠세라 손안에 꽉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려놓고 차근차근 살펴본다.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인가 물어본다.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유난히 더 멀리 간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자아, 혹은 적어도 의문을 제기받지 않는 자아를 생득권처럼 타고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려고 하고 그래서 멀리 여행한다.”

                                                                                                         《길 잃기 안내서》, 레베카 솔닛


나는 내 일이 좋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눈과 비를 맞지 않는 곳에서 일할 수 있으며 어디에 소속된 것도 아니라 딱히 '잘릴' 염려도 없는 이 일이 좋다. 그래서 멀리 가고 싶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알아보고 싶고 나 자신을 새로 만들어 보고 싶다. 심신단련, 나도 해 보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꿈을 검사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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